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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을 꺼이꺼이 생길 사자인지 여자는 좀 안전 기자 admin@slotmega.info1970년대 초 광주 백운광장에서 바라본 까치고개 수박등 일대. 광주시 제공
1942년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이자 경성콤그룹 대표였던 박헌영이 은신했던 옛 종연방직(현 전남·일신방직) 터. 광주시 제공
1945년 8월 17일 저녁 8시. 해방 사흘째 광주 시내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광주 동구 대인동 창평상회(현 박인천 가옥 주변) 앞에 목탄트럭 한 대가 출발을 서둘렀다. 여운 릴게임골드몽 형 선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전남지부 대표들을 태우고 서울로 떠나려는 참이었다.
트럭 한 자리에 무명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한 남자가 있었다. 건준 위원들은 이 남자가 누군지 몰랐다. 그저 전남 건준 위원 중 한명인 줄 알았다. 이 남자는 조선공산당(조공) 지도자 박헌영이었다.
그 무렵 서울시내에는 박헌영이 얼 바다이야기디시 른 나와 정국을 주도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박헌영은 8월15일 은신하던 광주 벽돌공장을 떠났다. 박헌영 평전을 쓴 안재성은 "박헌영은 공장주에게 장래를 위해 서울로 간다는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 허름한 옷차림 그대로 벽돌공장을 떠났다. 마지막 날까지도 공장주는 물론 그 누구도 그가 유명한 수배자 박헌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기술 릴게임사이트추천 했다.
박헌영은 일제로 부터 6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5년 만인 1939년 9월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 해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등과 '경성콤그룹'을 만들었다. 박헌영은 경성콤그룹을 통해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비밀리에 공산주의,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일제 경찰은 끈질기게 조선공산당을 추적했다. 일제는 조공을 백경게임 반체제 사상범으로 엄중하게 처벌했다. 1941년 무렵 국내 항일운동은 사실상 전무했다. 그 해 2월에 개정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이 결정타였다. 이 법은 전향할 가망성이 없거나, 보호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상범을 2년간 예방구금소에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는 그 횟수를 마음대로 늘릴 수 있어 무기한 수감이 가능했다.
모바일야마토 일제에 한번 걸리면 평생 감옥에 갇힌다는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여기에 국민총동원령이 지속적으로 발동되면서 징집과 친일이 판을 쳤다.
박헌영
# 은신처로 광주 방직, 벽돌공장 택해
1942년 12월, 박헌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울을 떠났다. 목적지는 머나 먼 전라도 광주였다. 여 비서격인 이순금과 함께 가난한 행상 부부로 변장해 광주에 도착했다. 그는 성삼이라는 가명으로 종연방직 광주공장 위생인부로 취직했다. 위생인부란 재래식 변소를 청소하고 똥 지게를 매는 직업이었다. (안재성 지음 '박헌영평전' 참조)
박헌영은 종연방직(일신·전남방직의 전신)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징용대상자로 지목됐다. 그는 곧바로 광주 백운동 215번지 광주 연와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지금의 까치고개에서 백운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길가 쯤에 벽돌공장이 있었다. 벽돌공장 인부들은 그를 김성삼 또는 김 서방이라고 불렀다.
벽돌공장은 직원들의 이동이 잦고, 신원 확인도 느슨했다고 한다. 조공의 거두 박헌영이 숨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벽돌공장 사장 이득윤은 김 서방의 왜소한 체격을 감안해 벽돌 세는 일을 시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싫어하는 힘든 삽질이며 벽돌 나르기만 했다. 일당은 2원70전을 받았다.
그는 왜 은신처로 광주를 선택했을까. 박헌영의 광주행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핵심 지도자가 은신처를 선택하려면 생존성과 활동성이 모두 보장돼야 한다. 자신을 지키면서 조직의 재건을 위해 혁명가의 과업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든든한 지원 조직이 필수적이다.
허나, 박헌영은 광주에서 활동하거나 거주한 적이 없었다. 그의 활동 동선을 보면 주로 상하이, 모스크바, 신의주, 함흥, 서울 등지였다.
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박헌영이 광주를 도피처로 택한 것은 전남지역에 지하조직과 지원그룹이 있었다는 의미"라면서 "전남의 서부지역은 서울파가 장악한 반면에 동부지역은 박헌영 계열인 화요회 계열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서울파와 화요회는 조공의 양대 계보였다.
박헌영의 아들로 입적한 원경 스님이 생전에 만든 '만화 박헌영'을 보면 당시 광주지역에서 남선전기 광주지점윤도형, 조흥은행 광주지점 고항, 조주순 등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고(6권), 박헌영은 이들을 만났다고 기술돼 있다. 또 이순금과 윤순달이 동행했다고 한다.
이순금
# 박헌영 지원 김범수 사위 조주순
윤순달을 비롯한 4인의 지원그룹은 어떤 인물일까.
우선 조주순을 살펴본다. 그는 화순 능주 출신으로 화순탄광의 경성콤그룹 지하 조직원이었다. 황광우 작가는 "당시 광주에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개업한 의사가 있었다. 김범수 의사다. 김범수의 손녀 김행자 씨의 회고에 의하면, 김범수는 해방 전 광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박헌영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비밀 조직원 조주순이 김범수의 사위다. 김범수가 딸에게 주는 생활지원금이 누구에게로 갔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고 밝힌 바 있다.
김범수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23년 총독부 의원 인턴 의사를 거쳐, 1924년 광주에서 남선의원을 개원했다. 이후 의사와 청년 활동가로 1926년 광주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공간에서 빨치산을 치료하다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념 보다는 의사라는 소명의식이 우선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이런 저런 인연으로 박헌영―조주순으로 이어지는 라인에 섞인 것으로 보인다.
고항은 고병일로도 불리며, 광주고등보통학교 12회 졸업생으로 일본 큐슈대 출신이었다. 그도 경성콤그룹 지하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윤순달
#광주행 동행한 강진 출신 윤순달
박헌영의 또 하나 라인은 윤순달이다. 1914년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마을 출신으로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자라서는 전북공립보통학교와 강경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서울로 올라가 2년제 전기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영등포 철공장 전기견습공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이재유가 주도한 조공 조직 '경성 트로이카'에 가담했으며, 1934년 경성전기회사 야체이카(세포조직원)로 활동했다.
1935년 12월 와해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조직된 경성 공산주의자 그룹 가운데 권영태 그룹에서 활동하던 중, 1936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37년 7월 출감했다.
1939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경성콤그룹'에서 박헌영을 도와 광복 때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40년 경성콤그룹 전남 책임자를 맡았다. 박헌영이 은신할 때 남선전기(한국전력의 전신) 전남지사장을 맡고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부터 조선공산당 광주시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49년 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조직부장에 올랐다.
윤순달은 철저하게 노동운동을 통해 독립과 공산 사회를 꿈꿨다. 그는 또 조공에 적을 두면서 박헌영과 늘 같은 조직 라인을 형성했다. 박헌영이 믿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윤순달 이었다.
윤순달의 작은아버지는 전남운동협의회 강진 총책이었던 윤가현이다. 윤가현도 경성콤그룹에 가담했고, 10년 5개월의 감옥살이를 겪었다. 6·25전쟁 때 대둔산을 근거지 삼은 충남 빨치산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전투 중에 숨졌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 소장은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의 광주 은신에는 경성콤그룹 전남조직원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가 있었다"면서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은 일제하 항일 혁명 독립을 표방한 단체로 해방 후 북한의 공산당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고 강조했다.
그 누구보다 철저하고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대결했던 조선공산당과 그 비밀당원들.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조공의 항일 운동은 평가가 뒤틀려 있다.
광복 80년, 이제라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바로 서기를 희망한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광주시 남구 백운동 수박등 일원(옛 벽돌공장
1942년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이자 경성콤그룹 대표였던 박헌영이 은신했던 옛 종연방직(현 전남·일신방직) 터. 광주시 제공
1945년 8월 17일 저녁 8시. 해방 사흘째 광주 시내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광주 동구 대인동 창평상회(현 박인천 가옥 주변) 앞에 목탄트럭 한 대가 출발을 서둘렀다. 여운 릴게임골드몽 형 선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전남지부 대표들을 태우고 서울로 떠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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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서울시내에는 박헌영이 얼 바다이야기디시 른 나와 정국을 주도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박헌영은 8월15일 은신하던 광주 벽돌공장을 떠났다. 박헌영 평전을 쓴 안재성은 "박헌영은 공장주에게 장래를 위해 서울로 간다는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 허름한 옷차림 그대로 벽돌공장을 떠났다. 마지막 날까지도 공장주는 물론 그 누구도 그가 유명한 수배자 박헌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기술 릴게임사이트추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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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신처로 광주 방직, 벽돌공장 택해
1942년 12월, 박헌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울을 떠났다. 목적지는 머나 먼 전라도 광주였다. 여 비서격인 이순금과 함께 가난한 행상 부부로 변장해 광주에 도착했다. 그는 성삼이라는 가명으로 종연방직 광주공장 위생인부로 취직했다. 위생인부란 재래식 변소를 청소하고 똥 지게를 매는 직업이었다. (안재성 지음 '박헌영평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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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은신처로 광주를 선택했을까. 박헌영의 광주행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핵심 지도자가 은신처를 선택하려면 생존성과 활동성이 모두 보장돼야 한다. 자신을 지키면서 조직의 재건을 위해 혁명가의 과업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든든한 지원 조직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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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박헌영이 광주를 도피처로 택한 것은 전남지역에 지하조직과 지원그룹이 있었다는 의미"라면서 "전남의 서부지역은 서울파가 장악한 반면에 동부지역은 박헌영 계열인 화요회 계열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서울파와 화요회는 조공의 양대 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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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조주순을 살펴본다. 그는 화순 능주 출신으로 화순탄광의 경성콤그룹 지하 조직원이었다. 황광우 작가는 "당시 광주에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개업한 의사가 있었다. 김범수 의사다. 김범수의 손녀 김행자 씨의 회고에 의하면, 김범수는 해방 전 광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박헌영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비밀 조직원 조주순이 김범수의 사위다. 김범수가 딸에게 주는 생활지원금이 누구에게로 갔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고 밝힌 바 있다.
김범수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23년 총독부 의원 인턴 의사를 거쳐, 1924년 광주에서 남선의원을 개원했다. 이후 의사와 청년 활동가로 1926년 광주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공간에서 빨치산을 치료하다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념 보다는 의사라는 소명의식이 우선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이런 저런 인연으로 박헌영―조주순으로 이어지는 라인에 섞인 것으로 보인다.
고항은 고병일로도 불리며, 광주고등보통학교 12회 졸업생으로 일본 큐슈대 출신이었다. 그도 경성콤그룹 지하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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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행 동행한 강진 출신 윤순달
박헌영의 또 하나 라인은 윤순달이다. 1914년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마을 출신으로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자라서는 전북공립보통학교와 강경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서울로 올라가 2년제 전기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영등포 철공장 전기견습공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이재유가 주도한 조공 조직 '경성 트로이카'에 가담했으며, 1934년 경성전기회사 야체이카(세포조직원)로 활동했다.
1935년 12월 와해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조직된 경성 공산주의자 그룹 가운데 권영태 그룹에서 활동하던 중, 1936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37년 7월 출감했다.
1939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경성콤그룹'에서 박헌영을 도와 광복 때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40년 경성콤그룹 전남 책임자를 맡았다. 박헌영이 은신할 때 남선전기(한국전력의 전신) 전남지사장을 맡고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부터 조선공산당 광주시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49년 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조직부장에 올랐다.
윤순달은 철저하게 노동운동을 통해 독립과 공산 사회를 꿈꿨다. 그는 또 조공에 적을 두면서 박헌영과 늘 같은 조직 라인을 형성했다. 박헌영이 믿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윤순달 이었다.
윤순달의 작은아버지는 전남운동협의회 강진 총책이었던 윤가현이다. 윤가현도 경성콤그룹에 가담했고, 10년 5개월의 감옥살이를 겪었다. 6·25전쟁 때 대둔산을 근거지 삼은 충남 빨치산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전투 중에 숨졌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 소장은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의 광주 은신에는 경성콤그룹 전남조직원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가 있었다"면서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은 일제하 항일 혁명 독립을 표방한 단체로 해방 후 북한의 공산당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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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 이제라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바로 서기를 희망한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광주시 남구 백운동 수박등 일원(옛 벽돌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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