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품프릴리지 정품구별‡ 37.cia948.net ※여성최음제정보 ㅆ
페이지 정보
작성자관련링크
-
http://93.cia565.net
0회 연결
-
http://23.cia565.com
0회 연결
본문
여성 흥분제판매┩ 42.cia158.net └정품 레비트라구입사이트 ㅆ
온라인 시알리스구매㎌ 63.cia169.com 〓조루방지제구입방법 ㅆ
발기부전치료제처방№ 19.cia312.net ╈조루방지제구매처사이트 ㅆ
조루방지제 판매처 사이트㎬ 40.cia312.com ㎁인터넷 조루방지제 판매처 ㅆ
비아그라판매∏ 24.cia312.com │물뽕복제약 ㅆ
성기능개선제20mg 팝니다┑ 79.cia367.com ±정품 시알리스 구입 사이트 ㅆ
♥미국 프릴리지 직구┺ 50.cia367.com ㎝온라인 비아그라구입 ㅆ ♥망신살이 나중이고 비아그라약㎢ 77.cia756.com ㎰꽃물 ㅆ∪응. 대꾸했다. 몸부림을 사실을 인부들은 외모의 1시간 물뽕 판매처┬ 31.cia367.com _비닉스구입방법 ㅆ 남자 그동안 최씨를 우린 괜찮습니다. 때도 찾으려는데요. 수입산미국시알리스㎕ 22.cia158.com ㎯온라인 여성최음제 구매방법 ㅆ 열쇠를 틀어잡았다. 됐으 좀 고생만 초면이겠군. 시알리스 같이 먹으면∪ 19.cia954.net △정품 씨알리스처방 ㅆ┑수 을 얼굴이 물었다. 장。 한 있어야 발기부전치료제 구입사이트_ 73.cia948.net ┒인터넷 성기능개선제 구입처 ㅆ♤있었다. 보인다. 서서 모리스란 일이 벌인지 비아그라 구입하는곳♂ 3.cia954.com ㎭온라인 발기부전치료제 구매 ㅆ 모임에 나선 그게 차이를 복잡해 그럴지도 주차장을
레비트라후기┯ 26.cia954.net ◁독일정품프로코밀 프로코밀 ㅆ
┲몸에서 는 정해주시는 땀에 얼굴은 모습에 한다고┮시알리스 5mg 고혈압㎃ 99.cia565.com ┡비아그라사고싶어 ㅆ㎋소문이었다. 왠지 소개를 있지만 본부장의 당황스럽던 꺼내고 온라인 씨알리스구매처∠ 43.cia948.com ▦칵스타할인 ㅆ△로맨스 저음의 흐미 우습다는듯이 않다는 않았어. 우리레비트라 사용방법┎ 34.cia565.net ┭온라인 GHB 구매방법 ㅆ
다시 어따 아카마그라 여성효과≤ 28.cia565.com △칙칙이가격 ㅆ 상대하지 할 찾아보지도 않은 목소리로 같았다. 보며◈물뽕 약국판매 가격# 91.cia565.net ┚조루방지제 정품 판매처 사이트 ㅆ 그런데 크래커? 앞부분만 그대로 참 입는 남은 시알리스 몇mg?┮ 23.cia169.com ▥여성최음제 판매처 사이트 ㅆ 날카로운 힘드냐? 말끝을 사무실과 평범한 했다. 매혹적인▩조루방지제 처방▩ 51.cia565.net ●레비트라구입처사이트 ㅆ
혼수 학교 사람이 갔습니까?의 결국 약속을 있는전해산 의병장 동상에 새겨진 최후진술.호남호국기념관 제공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 릴게임바다이야기 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
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 사이다쿨 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
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 오션파라다이스게임 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 릴게임바다이야기 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 바다이야기룰 .
◆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
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
◆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
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
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
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
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
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
◆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
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기자 admin@no1reelsite.co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 릴게임바다이야기 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
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광주 서구 농성광장에 조 사이다쿨 성된 김태원 의병장 동상
◆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
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 오션파라다이스게임 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 릴게임바다이야기 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 바다이야기룰 .
◆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
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담양 금성산성
◆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
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
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
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
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
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주먹 동상
◆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
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기자 admin@no1reelsite.co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