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문학관이나 작가 생가 또는 기념비가 한두 곳은 있다. 대부분 지역 출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문학 기념물이 있어도 찾는 발걸음이 없고, 무관심하다면 건립하고 기록하는 의미가 있을까. 지난 시대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지역 곳곳에 있는 생가, 시비, 문학관 등 문학 기념물을 톺아보고자 한다. 
"아버지, 시인 중에 김춘수 시인 아시겠어요?"
"글쎄다. 어떤 시 썼는지 모르겠네."
여든일곱의 아버지와 함께 산청군 신안면에서 김춘수 유품전시관이 있는 통영으로 출발했다. 청춘의 한 시절 남몰래 시를 긁적였던 아버지는 시인 김춘수를 잘 모르는지 아니면 기억을 잃었는지 "글쎄다"라고 파산선고 답했다. 시인보다는 그저 아버지에게 바다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게다. 일요일 오전 7시께 진주를 지나 고성으로 들어서자 통영-대전 고속도로는 온통 안개다. 산도 터널도 안개 속에 묻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빨려가는 듯했다. 
시인 김춘수(金春洙·1922~2004). 대중적으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 국민은행 디딤돌대출 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시 '꽃'을 쓴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많은 시를 남겼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김종길(1926~2017)은 그를 두고 '땅으로 귀양 온 천생의 시인'이라 일컬었다. 

김춘수 시인은 통영시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통영중 교사로 재직하던 1947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 학자금대출 지급실행 〉를 출간했다. 그 후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활발한 시작 활동을 벌였다. 2004년 향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20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고 한국 시문학에 독보적인 흐름을 남겼다.




통영 봉평동 해안길 끝에 있는 김춘수 유품전시관. /권영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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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산 아래 생가길과 '꽃' 시비가 있다 = 통영에 도착하니 오전 8시가 채 되지 않았다. 첫 목적지는 '김춘수 생가길'이다. 큰길에서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헤매는데, 인근 가게 주인이 "가까우니 여기 주차해두고 갔다오이소, 장삿집이지만 이른 아침이라 괜찮심니더"하고 친절하게 말 예금금리인상 을 건넸다. 생전 시인이 살던 집은 자취도 없지만 그 일대 좁은 골목에는 시인을 기억하고 기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누구에게나 애송되는 시인의 대표시와 통영을 노래한 시편들이 그림과 함께 낡은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시비 '꽃'은 이곳에서 200~300m 거리의 남망산 입구 작은 공원에 있다. 걸어가야 할 거리지만 거동 불편한 아버지가 있어 차로 이동했다. 정자와 나무 몇 그루 조성된 공원은 주민들의 쉼터였다. 그 사이에 시인의 얼굴이 동판으로 새겨진 시비가 통영항과 동피랑을 바라보고 있다. 시비는 '꽃과 의미를 그리는 사람들 회원'들이 2007년 11월 29일 세운 것으로 돼 있다. 내가 차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오전 9시 정각 김춘수 유품전시관에 도착했다. 요즘 말로 '오픈런(매장이 열리자 마자 경쟁적으로 입장하는 현상)'을 한 셈이다. 통영항이 한눈에 건너다보이는 봉평동 바닷길, 그 끝자락에 유품전시관이 있다. 유품전시관은 입구 경사로가 있었지만 걸음을 지팡이에 의지하는 아버지가 둘러보기에는 힘들었다. 아버지는 건물 밖 그늘에 앉아 하루에 피우는 세 개비 담배 중 하나를 꺼내 피웠다. 봉평동 바다와 건너 판데(당동지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날렸다.




통영 남망산 아래 작은 공원에 있는 김춘수 '꽃' 시비. /권영란 작가


◇유품전시관은 왜 그대로일까 =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시인이 작고한 뒤 4년 뒤인 2008년 3월 28일 개관했다. 옛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시인을 기억하고 기념하기엔 좁고 누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개인적으로 이미 여러 차례 와본 곳이다. 올 때마다 왜 아직 문학관이 아니고 유품전시관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게 했다.
유품전시관은 1~2층에 걸쳐있다. 시인의 육필 원고 126점과 서예 작품, 액자, 사진을 전시해 놓고 의복, 책, 가구 등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이 전시돼 있다. 특히 2층 전시관에는 시인이 생전에 기거하던 '시인의 방'을 재현해 놓았다. 침대와 1인 소파, 액자, 책상과 그리고 책과 소파, 탁자가 놓인 응접실을 살펴보면 생전 시인의 생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거기에다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평소 애용하던 모자와 나비넥타이, 안경이 고이 전시돼 있다. 생전에 사용하던 사전과 책 등을 전시해 시인의 취향과 집필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얼핏 보기로는 스타일이 아주 좋은 '모던 보이'였구나 싶다. 그리고 삶이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풍요로웠구나 싶다.
언젠가 전시관을 지키는 직원에게 "왜 새로이 조성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마이 낡았지예. 통영시가 조만간 계획하고 있다던데예"라는 대답을 얼핏 들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 다시 찾은 유품전시관은 자세한 설명 한 줄 없이 2008년 개관 때 그대로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시인은 제5공화국 때 국회의원으로 잠시 정치 생활을 했고,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쓴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통영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걸까. 한 생애를 흠 없이 견결하게 산다는 건 힘든 일이다.

전시관에서 나오니 아버지는 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해안가엔 작은 배들이 여러 척 묶여있다. 그저 고깃배인가 싶었는데 통영을 샅샅이 훑어 기록하고 있는 김상현 통영인뉴스 기자가 '해녀 배'라고 알려줬다. 해녀들이 인근 바다로 물질 갈 때 이용하는 배다. 아버지의 굽은 등이 한층 더 굽어진다. 잠시 졸고 있었던 걸까. 다행히 짊어진 한 생애가 이제 몸피만큼 가벼워 보인다.




김춘수 유품전시관 내부에 사진이 걸려있다. /권영란 작가





김 시인이 생전에 사용한 필통과 사전들. /권영란 작가


◇시인에 관한 여러 의견 = 지난 16일이었다. 김춘수 유품전시관 취재를 앞두고 자료를 뒤적이다가 문득 페이스북을 통해 김춘수 시인에 관해 물었다. 어떤 시인인지, 기억하거나 좋아하는 시, 시 세계에 대해,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왜 문학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지 등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나, 여럿이 주거니 받거니 한 이야기들이 시인 김춘수를 가늠케하는 내용이라 정리한다.
창원 사는 정구일 씨는 필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려줬다. 마산고등학교 교정에는 '스승 김춘수와 제자 천상병의 만남'에 관한 시비가 있었다. 시인이 한국전쟁 무렵 마산고등학교 재직할 때 일이다.
수원에서 헌책방을 하고 있는 윤한수 씨는 "전두환 찬양시를 지었던 시인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서정주 마냥 친일은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부분이다. 김춘수는 제5공화국 때 전두환 찬양시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를 썼다. 창원 목우공방은 "기념관 앞에 돌에 새겨놔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왕일규 씨가 건네준 경남도민일보 2007년 8월 1일 자 기사를 보면 시인의 행적이 좀 더 구체적이다. '아부와 저항으로 갈라진 문인들' 기사에서 당시 기사를 쓴 김주완 기자는 "3.15마산의거 직후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추모 시 '베고니아 꽃잎처럼이나'를 발표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전두환 독재의 총칼 앞에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통영 출신으로 통영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마산의 민족자산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일당과 함께 민정당 창당 발기인 15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 덕에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진주 사는 성순옥 씨는 "그래도 불후의 명작 '꽃'을 남겼다"고 말하고, 통영 사는 정용재 씨는 "한국 현대 시문학의 흐름을 논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뺄 수 없는 인물이고, 시의 창작과 이론적인 측면에서 후대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모든 공로와 허물은 오롯이 시인의 몫이다. 거제 시민 박보근 씨는 "파인 자리 숨기고 감추려니 탈"이라 했다. 박 씨의 말처럼 시인의 허물마저 드러내고 알리는 게 제대로 된 기억이고 기록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국도 14호선을 탔다. 통영시 도산면 학섬휴게소를 지날 무렵 아버지는 "바다가 우리를 따라 오네"라고 말했다. 멀리 통영 바다와 작은 섬이 보였다. 조금 더 지나니 바다 휴게소다. 그러자 아버지는 "바다가 여까지 와서 우리를 배웅하네"라고 말했다. 이른 새벽 길을 나서 통영까지 동행한 아버지는 정작 김춘수 유품전시관도 시비도 생가길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지팡이를 짚고 차 안에서 혹은 해안길에서 먼빛으로 통영바다를 바라봤을 뿐. 
'꽃'에서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고, 통영 바다는 여든일곱의 아버지에게 와서 비로소 바다가 됐다. 

 /권영란 지역 스토리텔링 전문가·작가




권영란 작가. /이서후 기자 


지역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시장으로 여행가자〉,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 〈경상의 말들〉을 차례로 출간했다.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으로 제1회 한국지역출판대상을 받았다. 2016년부터 한겨레신문에 서울·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지역 기록과 경남 토박이말 채록 작업을 궁리 중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