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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월남 이상재 생가.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 강압통치를 하던 때였다. 월남 이상재가 미술단체 행사에 갔는데 마침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도 와있었다. 월남이 비위가 상해 "대감들도 도쿄로 이사를 가시지요."라고 말을 걸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이 어리둥절하여 "별안간 무슨 말씀이오?"라고 물었다. 월남은 태연히 "대감들은 나라 망치는데 천재 아니요? 도쿄로 이사 가면 일본도 망할 거 아니겠소!"라고 쏘아붙였다.
충남 서천 출신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바다이야기배당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 이상재는 재미 있는 일화가 많이 전한다. 일제 강점기 항일의 걸으며 한 번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해학과 풍자 위트가 넘치는 언행으로 친일파들을 힐난했다. 이념과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를 존경했으며, 일제조차 강직하고 당당하고 의연한 그를 어쩌지 못했다주식노하우
.
월남 이상재는 1850년 충남 서천군 종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4세 때 강릉 유씨와 결혼했다. 과거에 뜻을 둔 월남은 공주 마곡사에서 2년 동안 공부한 뒤 시험(진사시)을 봤으나 낙방했다. 낙담하고 있던 그에게 우연치 않게 입신의 길이 열린다. 부친 이희택이 조카 이장직에게 아들을 부탁했는데, 이장직이 고종사촌인 릴게임동영상
박정양에게 천거한 것이다.
월남은 13년간 박정양의 집에서 겸인(비서)로 대소사를 처리하고 시대의 흐름을 익혔다. 박정양은 과거로 벼슬을 시작했지만 온건한 개화파의 길을 걸었고 고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내무대신과 총리대신서리 등의 요직을 지냈다. 월남에게는 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바다이야기황금고래
월남의 고향에는 이상재 선생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월남은 1881년 박정양을 따라 일본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에 동행했다. 시찰단은 약 4개월 간 도쿄와 오사카의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성과 군부 등을 돌아봤다. 월남은 이때 개화파 홍영식·윤치호·유길준진매트릭스 주식
등과 친분을 쌓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르게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81년 일본 방문 당시 관복 차림의 월남 이상재.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은 1884년 우정총국(우체국)이 설치되자 홍영식의 추천으로 인천 우정분국장이 됐으며, 1887년에는 박정양의 도움으로 신식 부대인 친군후영에서 일했다.
1988년 박정양이 미국 공사로 부임하자 서기관의 자격으로 동행했다. 박정양 공사는 당시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제출했고, 미국의 발전상을 두루 살펴보았다. 월남도 서양의 일원인 미국의 힘을 체험하고 부국강병과 국제관계에 눈을 떴다.
월남은 1892년 신식화폐를 발행하는 전환국의 위원, 갑오개혁 때는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학무아문의 참의(정3품) 등을 맡았다. 1895년에는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의 참서관을 지냈고, 대한제국이 세운 외국어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아관파천 시기에는 의정부 수장인 내각총리대신의 행정실무를 책임지는 내각총서 등을 지냈다.
이 무렵 고종과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루는 월남이 러시아대사관 고종의 집무실에 들르니 보라색 보자기가 있었다. 간신들의 뇌물임을 눈치챈 월남은 시치미를 떼고 "상감께서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며 난로 속에 집어넣었다. 간신배와 고종이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월남의 강직함과 충직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 사회를 보는 이상재. 월남은 명사회자이자 토론자로 이름이 높았다.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은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남궁억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협회는 자주독립과 내정개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단체로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개최 등을 추진했다. 월남은 만민공동회의 토론자와 사회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협회는 6개 조의 개혁안을 황제에게 제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으나 조병식 등 친러 수구파의 모함으로 이상재 등 간부 17명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승만과 회원들이 6일 동안 시위를 벌이며 석방을 요구하자 고등재판소는 가벼운 태형과 벌금을 부과하고 석방했다.
1898년에는 박영효 역모사건에 말려든다. 친러파가 "유길준 이상재 등이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한 것이다. 월남은 아들 승인과 함께 체포돼 국사범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1월 감옥을 탈옥하려다 실패, 위기에 빠졌으나 미국인 선교사 알렌 등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한성감옥 시절의 이상재(앞줄 왼쪽부터 네번째). 맨 왼쪽 서 있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자료=국가보훈부
한성감옥 수감 기간 동안 월남은 인생의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옥중에서 성경을 읽고 54세의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1904년 3년 만에 석방되자 곧바로 연동교회에 다니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이 무렵 월남은 고종의 요청으로 의정부 참찬이 됐으나 1906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관직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것이다. 밀사사건으로 고종도 퇴위했으며, 이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평생의 은인이던 박정양도 사망한 터였다.
일제하 초기 황성(서울)YMCA 지도자들.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월남 이상재이다.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은 인생 후반기 기독교 선교와 교육계몽 운동에 헌신했다. 1913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질레트 YMCA를 추방하자 후임을 맡았으며, 일제가 한국 YMCA를 일본 기독교계에 예속시키려 하자 일본을 방문, 담판을 지어 막아냈다.
이 무렵 일제는 YMCA 총무를 맡아 꼿꼿하게 저항하는 월남을 매수하려 했다. 거금 5만원을 주겠다며 조용히 살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월남은 단칼에 이를 거절했다. 청년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국 10개 YMCA를 규합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 명예총무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배후인물로 지목돼 3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1922년에는 신흥우 김필례 김활란 등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의 손정도 의정원장 등이 월남을 찾아와 내홍을 거듭하는 임시정부의 수반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월남은 "나까지 조국을 떠나면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불쌍하지 않느냐?"며 고사했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연합 소년척후단(보이스카웃)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이 되었다.
월남의 마지막 명함은 신간회 회장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창립한 항일단체로 좌우 모두 신망하는 그를 회장으로 모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월남은 당시 병석에 누워있었고, 3월 29일 78세로 세상을 떴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독립운동 단체의 얼굴로 내놓은 것이다.
1927년 4월7일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서울시민 30만명 중 10만명이 운구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사진=국가보훈부
월남이 죽자 전국민이 애도했고 장례식은 한국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각계 인사가 망라된 장의위원회가 조직됐으며, 당시 서울시 인구 30만명중 10만 명이 운구행렬에 참여했다.
월남은 평생 월세집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고, 죽었을 때 아들에게 미곡 27 가마의 빚만 남겼다고 한다.
기념관 앞에 세워진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월남은 많은 나이에 독립운동을 벌였다. 1850년 생으로 개항에서 을사늑약-경술국치-3.1운동-신간회에 이르는 망국의 시대를 고스란히 살다 갔다. 동시대 문화계몽운동가나 실력양성론자들 대부분이 변절했지만 철저하게 반일과 항일노선을 고수했다. 월탄 박종화는 월남의 묘비에 "선생은 웃음 가운데 눈물을 감추셨고, 위엄을 지니셨다."고 적었다. 월남은 궁핍한 시대, 조선인의 가슴에 독립의 꿈을 심고 거름을 주며,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울며 살다간 진정한 애국지사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 강압통치를 하던 때였다. 월남 이상재가 미술단체 행사에 갔는데 마침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도 와있었다. 월남이 비위가 상해 "대감들도 도쿄로 이사를 가시지요."라고 말을 걸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이 어리둥절하여 "별안간 무슨 말씀이오?"라고 물었다. 월남은 태연히 "대감들은 나라 망치는데 천재 아니요? 도쿄로 이사 가면 일본도 망할 거 아니겠소!"라고 쏘아붙였다.
충남 서천 출신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바다이야기배당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 이상재는 재미 있는 일화가 많이 전한다. 일제 강점기 항일의 걸으며 한 번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해학과 풍자 위트가 넘치는 언행으로 친일파들을 힐난했다. 이념과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를 존경했으며, 일제조차 강직하고 당당하고 의연한 그를 어쩌지 못했다주식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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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는 1850년 충남 서천군 종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4세 때 강릉 유씨와 결혼했다. 과거에 뜻을 둔 월남은 공주 마곡사에서 2년 동안 공부한 뒤 시험(진사시)을 봤으나 낙방했다. 낙담하고 있던 그에게 우연치 않게 입신의 길이 열린다. 부친 이희택이 조카 이장직에게 아들을 부탁했는데, 이장직이 고종사촌인 릴게임동영상
박정양에게 천거한 것이다.
월남은 13년간 박정양의 집에서 겸인(비서)로 대소사를 처리하고 시대의 흐름을 익혔다. 박정양은 과거로 벼슬을 시작했지만 온건한 개화파의 길을 걸었고 고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내무대신과 총리대신서리 등의 요직을 지냈다. 월남에게는 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바다이야기황금고래
월남의 고향에는 이상재 선생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월남은 1881년 박정양을 따라 일본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에 동행했다. 시찰단은 약 4개월 간 도쿄와 오사카의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성과 군부 등을 돌아봤다. 월남은 이때 개화파 홍영식·윤치호·유길준진매트릭스 주식
등과 친분을 쌓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르게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81년 일본 방문 당시 관복 차림의 월남 이상재.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은 1884년 우정총국(우체국)이 설치되자 홍영식의 추천으로 인천 우정분국장이 됐으며, 1887년에는 박정양의 도움으로 신식 부대인 친군후영에서 일했다.
1988년 박정양이 미국 공사로 부임하자 서기관의 자격으로 동행했다. 박정양 공사는 당시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제출했고, 미국의 발전상을 두루 살펴보았다. 월남도 서양의 일원인 미국의 힘을 체험하고 부국강병과 국제관계에 눈을 떴다.
월남은 1892년 신식화폐를 발행하는 전환국의 위원, 갑오개혁 때는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학무아문의 참의(정3품) 등을 맡았다. 1895년에는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의 참서관을 지냈고, 대한제국이 세운 외국어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아관파천 시기에는 의정부 수장인 내각총리대신의 행정실무를 책임지는 내각총서 등을 지냈다.
이 무렵 고종과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루는 월남이 러시아대사관 고종의 집무실에 들르니 보라색 보자기가 있었다. 간신들의 뇌물임을 눈치챈 월남은 시치미를 떼고 "상감께서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며 난로 속에 집어넣었다. 간신배와 고종이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월남의 강직함과 충직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 사회를 보는 이상재. 월남은 명사회자이자 토론자로 이름이 높았다.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은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남궁억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협회는 자주독립과 내정개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단체로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개최 등을 추진했다. 월남은 만민공동회의 토론자와 사회자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협회는 6개 조의 개혁안을 황제에게 제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으나 조병식 등 친러 수구파의 모함으로 이상재 등 간부 17명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승만과 회원들이 6일 동안 시위를 벌이며 석방을 요구하자 고등재판소는 가벼운 태형과 벌금을 부과하고 석방했다.
1898년에는 박영효 역모사건에 말려든다. 친러파가 "유길준 이상재 등이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한 것이다. 월남은 아들 승인과 함께 체포돼 국사범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1월 감옥을 탈옥하려다 실패, 위기에 빠졌으나 미국인 선교사 알렌 등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한성감옥 시절의 이상재(앞줄 왼쪽부터 네번째). 맨 왼쪽 서 있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자료=국가보훈부
한성감옥 수감 기간 동안 월남은 인생의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옥중에서 성경을 읽고 54세의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1904년 3년 만에 석방되자 곧바로 연동교회에 다니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이 무렵 월남은 고종의 요청으로 의정부 참찬이 됐으나 1906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관직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것이다. 밀사사건으로 고종도 퇴위했으며, 이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평생의 은인이던 박정양도 사망한 터였다.
일제하 초기 황성(서울)YMCA 지도자들.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월남 이상재이다. 사진=월남이상재선생 기념사업재단
월남은 인생 후반기 기독교 선교와 교육계몽 운동에 헌신했다. 1913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질레트 YMCA를 추방하자 후임을 맡았으며, 일제가 한국 YMCA를 일본 기독교계에 예속시키려 하자 일본을 방문, 담판을 지어 막아냈다.
이 무렵 일제는 YMCA 총무를 맡아 꼿꼿하게 저항하는 월남을 매수하려 했다. 거금 5만원을 주겠다며 조용히 살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월남은 단칼에 이를 거절했다. 청년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국 10개 YMCA를 규합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 명예총무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배후인물로 지목돼 3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1922년에는 신흥우 김필례 김활란 등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의 손정도 의정원장 등이 월남을 찾아와 내홍을 거듭하는 임시정부의 수반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월남은 "나까지 조국을 떠나면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불쌍하지 않느냐?"며 고사했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연합 소년척후단(보이스카웃)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이 되었다.
월남의 마지막 명함은 신간회 회장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창립한 항일단체로 좌우 모두 신망하는 그를 회장으로 모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월남은 당시 병석에 누워있었고, 3월 29일 78세로 세상을 떴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독립운동 단체의 얼굴로 내놓은 것이다.
1927년 4월7일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서울시민 30만명 중 10만명이 운구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사진=국가보훈부
월남이 죽자 전국민이 애도했고 장례식은 한국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각계 인사가 망라된 장의위원회가 조직됐으며, 당시 서울시 인구 30만명중 10만 명이 운구행렬에 참여했다.
월남은 평생 월세집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고, 죽었을 때 아들에게 미곡 27 가마의 빚만 남겼다고 한다.
기념관 앞에 세워진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월남은 많은 나이에 독립운동을 벌였다. 1850년 생으로 개항에서 을사늑약-경술국치-3.1운동-신간회에 이르는 망국의 시대를 고스란히 살다 갔다. 동시대 문화계몽운동가나 실력양성론자들 대부분이 변절했지만 철저하게 반일과 항일노선을 고수했다. 월탄 박종화는 월남의 묘비에 "선생은 웃음 가운데 눈물을 감추셨고, 위엄을 지니셨다."고 적었다. 월남은 궁핍한 시대, 조선인의 가슴에 독립의 꿈을 심고 거름을 주며,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울며 살다간 진정한 애국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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