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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 교사였다. 39년 동안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었던 그가 2014년 정년 퇴임할 때 후배 교사들은 “아이들이 그리워서 일주일만 지나면 교문 앞에 서 계실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변중희 선생님’은 ‘배우 변중희’로 변신해 지난달 24일 개봉한 영화 ‘홍이’의 주연으로 스크린 속에 섰다. 앞서 드라마 ‘모범택시 2’ ‘낭만닥터 김사부 3’ 등에서 에피소드 주연을 맡으며 2023년 연말 시상식에서 ‘신스틸러’상을 받기도 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의 얼굴을 접한 이들은 연극 무대 등에서 오래 활동한 배우로 짐작하면 짐작했지, 39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친 다음 배우 인생을 신용회복중 시작했을 거라고는 감히 생각 못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인생 이모작’의 최고 사례라 할 만하다.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한겨레와 만난 배우 변중희.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급여압류제도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배우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변중희(75)는 40대 후반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인생에서 다시 뭔가를 한다면 연극배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고 이모작의 기원을 떠올렸다. “우연히 그 이듬해 교사 연극 동호회가 생긴다는 소식을 알게 됐어요. 그때도 ‘ 직장인채무통합대출 애가 고3이니까 올해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두 아이 다 키우고 난 다음에 시작한 동호회 연극이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남편이 마뜩잖아하는데도 1년에 한번 하는 공연이 다가오는 연말이 되면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두근했으니까요.”
한참 어린 동료 교사들과 교육극단 ‘푸른숲’을 만든 뒤 10년 넘게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공 한국은행 인사 연을 준비하던 재미가 한창일 무렵, 그러니까 환갑을 훌쩍 넘겨 정년 퇴직을 앞둔 즈음이었다. 극단 ‘연희단 거리패’ 출신 교사가 아는 감독의 부탁으로 단편영화 보조 출연을 그에게 제안했다. “그저 대사 안 틀리는 게 목표인 연기였는데도 너무 재밌어서 영화도 해보자고 용기를 냈죠. 학생 단편영화에 출연했다가 처음 도전한 장편영화 ‘파스카’(2015)에서 스크 주택청약종합저축 세금우대 린에 나온 내가 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후 ‘파스카’ 안선경 감독의 소개로 “나는 연기를 배우는 사람이니 시간만 맞으면 학생 작품이든 뭐든 다 하자는 마음으로” 독립영화들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영화제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던” 그는 국내 주요 영화제의 단골 게스트가 됐다. 이후 출연한 손석구의 연출 데뷔작 단편 ‘언프레임드-재방송’(2021)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인기 드라마의 출연으로 이어졌다.



단편영화 ‘언프레임드-재방송’. 왓챠 제공


“지금도 시간만 맞으면 고르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서 영화 ‘홍이’도 ‘할게요’ 했더니 황슬기 감독님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속으로 ‘그렇게 좋아하실 일이 아닐 텐데’ 생각했죠.(웃음)” ‘홍이’는 생활고에 내몰린 딸 홍이(장선)와 치매 초기 엄마 서희의 껄끄럽고 짧은 동거를 그린 작품이다. 그는 딸과 함께 살면서도 딸에게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서희를 연기한다. 미디어가 선호해온 전통적인 모성애 신화를 깨는 인물이다. “저 역시 서희처럼 부드러운 사람은 아녜요. 교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엄격한 부분도 있죠. 그런 면에서 비슷한 연배의 다른 배우들과 조금 결이 다르다는 감독님들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아직 제가 연기자로서 저의 틀을 갖추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죠.”
그는 어떻게 보면 매정하고 얄미운 엄마일 수도 있는 서희의 독립성에 공감했다고 했다. “미루어 보건대 서희는 이혼하고 아픈 친정엄마를 수발하면서 삶이 녹록하지 않았지만 쓰러지지 않은 인물이에요. 통장을 간수하고 매니큐어를 칠하면서 일상을 세우려 노력하죠. 이사를 가듯 덤덤하게 딸하고 헤어져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보려는 의지로 느껴졌어요.”



2023년 에스비에스(S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신스틸러’상을 받은 배우 변중희. 화면 갈무리


정년 퇴임 이후 출연한 영화·드라마가 30편 남짓. 미국 이민자 가족의 애환을 그린 영화 ‘라리랑’이 이달 말 개봉을 앞두고 있고, 케이블채널 드라마를 촬영 중이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연극할 때는 ‘언제 그만두나’만 기다리던 남편도 이제는 국민 배우라고 추켜올려주며” 배우 변중희의 삶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해준다고 한다. 누구나 선망할 만한 인생 이모작의 비법은 무엇일까?
“작품을 하다 보면 분량이나 배역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와요. 그럴 때마다 뿅망치로 두더지를 때리듯이 나를 다스리며 지키려고 노력해요. 눈앞에 주어진 것만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욕심을 안 내도 꿈이라는 건 이뤄지기도 하더라고요. 다만 좋았던 느낌만 간직하려고 합니다. 단편 ‘재방송’을 찍을 때 제가 연기한 이모가 자율신경계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어요. 머리를 흔들고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동시에 감정에 몰입하는 게 정말 힘들었거든요. 찍고 나서도 걱정이 앞섰죠. 손석구 감독님한테 ‘자연스러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안도감, 좋았던 기분 같은 걸 잊지 않으면서 연기하려고 합니다. 100살까지요. 하하~.”



영화 ‘라리랑’. 누리픽쳐스 제공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