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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소로야, 해변의 소년들, 1910, 캔버스에 유채, 118x185cm, 프라도 미술관
호아킨 소로야, 발렌시아 해변의 소녀, 1910, 캔버스에 유채, 69x100cm, 개인소장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 온라인릴게임 다. 종종 문학과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초저녁 바다와 두 여인,
아름다운 명화의 속사정
호아킨 소로야, 바닷가 산책(일부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확대), 1909, 캔버스에 유채, 205x200cm, 소로야 박물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이 보인다.
왼쪽은 아내 클로틸데, 오른쪽은 막 열아홉이 된 딸 마리아였다. 계절은 여름, 시간대는 태양이 낙하하는 초저녁이었다. 이곳은 스페인 발렌시아의 엘 카바냘 해변(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Playa de El Cabanyal). 화가가 평생을 가슴에 품은 바다였다. 이날 아내와 딸은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보라색 꽃장식 모자를 챙긴 아내는 이를 머리에 올렸다. 벗은 재킷은 팔에 걸치고, 손으로는 양산 손잡이를 쥐었다. 딸은 옷깃을 목 끝까지 세웠다. 붉은 기의 머리칼은 말아올리곤, 밀짚 챙을 든 팔을 휘적휘적 흔들어본다. 빛이 부서진다. 면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사포 같은 천이 휘날리고, 진주 귀걸이가 반짝인다. 파도는 갈색, 하늘색, 보라색의 색감을 흩뿌린다. 짧은 붓놀림으로 살린 모래사장은 뭉근해보인다. 이런 가운데, 가만 보면 두 사람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호아킨 소로야는 손이 빠른 화가였다. 그림을 눈 깜짝할 새 그린다는 말도 듣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 릴게임추천 로야도 평소 같은 빠르기를 보일 수 없었다. 아내와 딸, 그리고 여름날의 지중해 해안. 이를 더 오래 담아두고 싶었다. 소로야는 종종 붓을 내려놓기도 했다. 또 한 번 목울대가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호아킨 소로야, 바닷가 산책, 1909, 캔버스에 유채, 205x200cm, 소로야 박물관
소로야의 삶은 한때 그늘졌다.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한 시기도 있었다. 자신에게 그것밖에 못해주는 운명을 노려보고, 그따위밖에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한 적 또한 분명 있었다. 그런 인생이 이토록 푸르러질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있으면 “여보”, 그리고 “아빠”라는 말이 바람과 함께 닿았다.
추위를 묻는 아내의 염려, 구두를 신어 다리가 아프다는 딸의 칭얼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1909년, 당시 마흔여섯 살의 소로야가 그린 <바닷가 산책>. 이 그림은 세로 205㎝, 가로 200㎝에 이른다. 해변 풍경화로는 이례적으로 크다. 기어코 일군 찬란함을 실물 크기로 두고 싶은 욕심 때문이리라. 많은 이가 소로야를 해맑은 풍경을 찾아다닌 해변의 화가 정도로 보곤 한다. 그가 위대해진 건 이처럼 예쁜 장면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많다. 아예 틀린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는 그의 겨우 반쪽 모습일 뿐이다. 소로야가 잘 그린 건 또 있었다.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가족.
두 살에 부모 잃은 화가,
벨라스케스·고야에 빠지다
호아킨 소로야, 성유물에 입맞춤, 1893, 캔버스에 유채, 103.5x122.5cm, 빌바오 미술관
소로야는 고아였다.
1863년 발렌시아에서 출생한 소로야는 두 살에 부모를 잃었다. 두 사람은 식료품점을 둔 소박한 상인이었다. 사인은 콜레라였다. 한 해 터울 여동생과 갑자기 황무지에 남겨진 순간이었다. 소로야는 여렸다. 순하고, 눈물도 많았다. 그는 열쇠공인 이모 부부 밑에서 컸다. 나름대로 보살핌도 받았다. 그래도 부모의 사랑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섬세한 그의 가슴에는 서글픔, 또는 처연함과 비슷한 감정이 뿌리를 내렸다. 소로야는 이쯤부터 두 가지 마음을 품었다. 1년 내내 백퍼센트 서로를 위할 수 있는 내 연인을 찾아, 함께 가족을 꾸려보겠다는 소망. 그런 한편, 이는 단지 꿈일 뿐 끝내 이루지 못할 바람일 수 있다는 절망감이었다.
소로야는 아홉 살이 된 해부터 그림을 배웠다.
열여덟 살, 마드리드로 온 그때부터는 프라도 미술관을 수없이 오가며 감각을 키웠다. 그늘진 그의 심금을 울린 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엄숙한 묘사, 프란시스코 고야의 처절한 표현이었다. 소로야는 두 거장의 화풍을 지침으로 삼는다. 그랬다. 어쩌면 그는, 이들의 감성을 따르는 충실한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다.
어린 환자와 죄수, 지친 노동자…
빛 대신 그늘을 그렸던 나날들
호아킨 소로야, 백인 노예 무역, 1895, 소로야 박물관
만틸라(mantilla)를 두른 소녀 넷이 기차 삼등석 칸에 구겨져 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꾸며본 듯하지만, 어딘가 촌스러운 느낌을 감출 수는 없다. 시골에서 도시로. 보다 노골적으로는, 논밭에서 술집으로. 여인들은 그렇게 ‘팔려가고 있다’. 검은 천을 로브처럼 두른 노인은 포주다. 이들의 잡동사니 짐을 곁에 둔 채 감시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소녀들이 도망칠 수 없다는 건 막힌 객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속과 감금의 삶을 마주하리라는 점은 비좁은 간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은밀한 구성, 냉철한 관찰. 이는 벨라스케스의 정신과 맞물린다.제목은, <백인 노예무역>. 1897년, 소로야는 이 그림으로 프랑스 파리 살롱에서 상을 받았다.
호아킨 소로야, 슬픈 유산!, 1899, 캔버스에 유채, 210x285cm, 반카하
꼬마들이 발렌시아 말바로사 해변(Playa de la Malvarrosa)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미 많은 아이는 벌거벗은 채 물을 맞는다. 햇빛을 입에 물고, 파도를 살갗 위로 펴바른다. 곧 해맑은 웃음소리도 들릴 법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이들의 모습이 심상찮다. 대부분은 눈에 띄게 여위었다. 몇몇은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일부는 목발을 짚고 있으며, 두어 친구는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사실, 이들은 인근 요양 병원에서 생활하는 어린이 환자였다. 소아마비, 부모에게 이어받은 선천성 매독 등을 앓고 병약해진 희생자들이었다. 검은 옷의 수도사. 그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일종의 운동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쁜 풍경이 아닌, ‘고통스러운’ 장면인 것이다.
아이들은 눈이 멀거나, 미쳤거나, 장애가 있거나 (…)
이들의 존재가 나에게 통증을 안겼다.
나는 병원장에게 찾아가 말했다.
이 장면을 실물 그대로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훗날 소로야의 회고였다. 솔직한 직시와 거침없는 필치. 이는 고야의 유산과 결이 맞닿는다. 소로야는 마지막 색을 칠한 후 숨을 들이마셨다. 고심 끝에 제목을 붙였다. 그가 얹은 문장은, <슬픈 유산>. 소로야는 이 작품으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호아킨 소로야, 또 다른 마르그리트, 1892, 캔버스에 유채, 130.1x200cm, 밀드레드 레인 켐퍼 미술관
호아킨 소로야, 아직도 생선이 비싸다고 말하는가!, 1894, 캔버스에 유채, 151.5x204cm, 프라도 미술관
소로야는 이 밖에도 남루한 여죄수를 그렸다.
어업 중 갈고리에 걸려 피를 철철 쏟는 소년 어부를,죽어가는 군인과 굶주린 노동자를 붓으로 옮겼다. 그렇게 ‘사회적인’ 작품을 줄줄이 내보였다. 당시 소로야의 손끝은 빛보다는 그늘을 만들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껏 마주한 세상과도 어울려보였다. 하지만, 소로야는 <슬픈 유산>을 끝으로 이토록 절절한 그림 그리기를 사실상 멈춘다. 왜?
클로틸데, 그리고 아이들로 인해
가슴 속 응어리가 녹아 없어지다
클로틸데를 그리는 호아킨 소로야, 1905, 소로야 박물관 [크리스티안 프란젠]
클로틸데 가르시아 델 카스티요. 소로야의 삶을 유채색으로 물들인 여인이었다.
소로야가 클로틸데를 처음 본 건 10대 소년 당시의 한 시절, 햇빛 좋은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미술 학교에서 만난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눈썹이 진했다. 눈매는 우묵했다. 그런데, 웃을 때는 얼굴의 모든 곳이 부드러워졌다. 말씨는 다정했고, 가느다란 손발목이 향하는 곳에는 늘 다정함이 있었다. 나이 차는 두 살. 소로야는 클로틸데의 배려심을, 클로틸데는 그런 소로야의 의젓함을 기쁘게 바라봤다. 소로야는 클로틸데의 아버지 밑에서 잠시 일한 적도 있었다. 당시 클로틸데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했다. 그런 그의 영향 덕분일까. 그녀에게는 흔치 않은 예술적 감성도 있었다. 하지만, 소로야는 그런 클로틸데의 손을 감히 잡지 못했다. 나 따위라는 생각, 싱그러운 햇살에 괜히 그림자를 얹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를 멀찍이 둔 채 군 생활을 했다. 이어서는 곧장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 4년여간 유학 생활을 버텼다. 1888년, 고향 발렌시아로 돌아오니 어느덧 스물다섯. 소로야가 가장 궁금했던 건 클로틸데의 안부였다. 그녀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소식 앞에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알고 보니 그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아킨 소로야, 목욕 후, 1915, 캔버스에 유채, 130x150.5cm, 소로야 박물관
소로야는 그해 클로틸데와 결혼했다. 생애 가장 큰 용기를 낸 순간이었다.
꽃피는 기쁨도 있었지만, 밀려오는 슬픔도 없지는 않았다. 2년 뒤 품은 첫째 딸 마리아.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아슬아슬한 순간도 몇 차례 있었다. 내 사랑이 가난해서인지, 불행의 운명을 거스르려고 한 대가인지,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런 가운데 일을 쉴 수는 없었다. 클로틸데와 마리아를 두고, 이어선 아들 호아킨(1892년 출생)을 남기고, 또 한 번 막내딸 엘레나(1895년 출생)와 떨어진 채 홀로 마드리드 등으로 와야 했다. 마리아가 열이 있다거나, 아들 호아킨이 몸져누웠다(아들도 썩 튼튼하지 못했다)는 식의 소식이 닿을 때면 가슴은 또 타들어갔다.
호아킨 소로야, 어머니, 1895, 캔버스에 유채, 소로야 박물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소로야에게 변함없이 밝은 색채만 건네는 이가 있었다. 클로틸데였다.
클로틸데는 소로야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뿌리 깊은 불안을 끄집어내지도 않았다. 클로틸데에게는 심각한 일을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심각해보였던 많은 일이 실제로는 심각하지 않게 끝을 맺을 때도 많았다. 그녀는 세 아이를 정성껏 보살폈다. 가끔은 소로야에게 부친 편지에서 ‘당신의 못난이’(Tu Fea·뚜 페아)라는 투정 섞인 표현을 붙여 웃음도 이끌었다. 1895년, 그런 클로틸데가 엘레나를 낳고서 함께 잠든 장면. 소로야는, 그 앞에서 무언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 한구석의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클로틸데의 옅은 미소, 언니와 오빠에 이어 또 한 번 기적을 안고 온 아기, 새하얀 솜털 이불…. 색색한 숨소리와 달큰한 살냄새에 폭 젖은 듯한 그림. 제목은 <어머니>였다. 소로야는 표현하기 힘든 벅참, 어딘가 ‘채워지는 듯한’ 그 감정을 화폭에 녹였다.
호아킨 소로야, 해변을 따라 달리기, 1908, 캔버스에 유채, 90x166.5cm, 아스투리아스 미술관
소로야는 자기도 모르는 새 치유받고 있었다.
세상은 잔혹하다. 하지만 가끔은 미치도록 아름답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을 이어가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을 계속 지켜가야 한다. 어둠을 기록하는 일도 가치있지만, 힘겹게 살아남은 빛을 수호하는 일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는 클로틸데와 세 자식이 건넨 울림이었다. 소로야가 <슬픈 유산>을 끝으로 빛을 탐구하게 된 수많은 이유 중 묵직한 하나일 것이다.
나의 기적, 나의 보석함
그리고 또 그려도 좋았다
호아킨 소로야, 나의 가족, 1901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대에게 이미 말했죠.
매번 같은 말만 하게 돼요.
그림을 그리는 일,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
그게 전부랍니다.
호아킨 소로야, 클로틸데에게 쓴 편지 문장 중 일부
미국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까지도 직접 그린 소로야지만, 사실 그는 초상화 작업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다.
대상을 그리려면 각별한 관심부터 가져야 하는데, 그 마음의 문을 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로야가 그리고 또 그린 얼굴. 클로틸데와 자식들이 사실상 유일했다. 소로야는 <슬픈 유산> 직후 <나의 가족>을 내놓았다. 클로틸데의 붉은 드레스, 첫째 마리아의 손, 둘째 호아킨의 눈빛과 막내 엘레나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폭에는 소로야 본인도 있다. 그의 얼굴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다. 붓과 팔레트를 든 소로야의 눈빛은 강렬하다. 기적과도 같은 삶의 보물함 앞에서는, 그 또한 진심 어린 관심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아킨 소로야, 나의 아이들, 1904, 캔버스에 유채, 160.5x230.5cm, 소로야 박물관
호아킨 소로야, 물고기를 바라보는 마리아(건강을 회복하고 있던 시기), 1907, 캔버스에 유채, 81x105.8cm, 런던 그래프턴 갤러리
소로야는 얼마 안 가 또 <나의 아이들>을 작업했다. 자식들은 그사이 더 컸다. 마리아는 꽤 성숙해졌다. 호아킨과 엘레나 또한 제법 점잖아졌다. 내 자식들이 이렇게나 예쁘게 잘 크고 있어요. 이것은 자랑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1906년. 소로야가 마흔셋, 마리아가 열여섯이 된 그해에는 큰 위기가 있었다. 마리아가 결핵에 걸리고 만 것이다. 소로야는 유럽 전시 일정을 일부 취소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고 한다. 마리아가 생기를 되찾을 때까지 울면서 곁을 지켰다고 한다. 소로야는 마리아의 투병, 조금씩 기운을 찾는 모습 등을 화폭에 옮기기도 했다. 마치 곧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양 아름답고, 찬란하게.
호아킨 소로야, 소파에 앉아있는 클로틸데, 1910, 캔버스에 유채, 180x110cm, 소로야 박물관
호아킨 소로야,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클로틸데, 1910, 캔버스에 유채, 150x105cm, 소로야 박물관
내 모든 사랑은 그대에게 쏠려 있어요.
우리 아이들에 대한 큰 사랑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대는 훨씬, 아주 훨씬 더 소중한 존재예요.
(…)
당신은 내 영원한 이상이니까요.
호아킨 소로야, 클로틸데에게 쓴 편지 문장 중 일부
이런 와중에, 소로야의 초상화 세계로 마음껏 입장할 수 있는 특권을 쥔 인물. 맨 앞줄에는 역시나 아내 클로틸데가 있었다.
소로야에게 클로틸데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장르였다. 참을 수 없는 정물이자, 그리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풍경이었다. 소로야는 흰 원피스의 클로틸데가 청순해서, 검은 이브닝드레스의 클로틸데가 매혹적이어서 또 붓을 들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를 보고, 캔버스 속 클로틸데는 소로야를 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 특히 그녀의 깊고 진한 눈을 그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직 그녀뿐, 배경 따위는 잘 보이지도 않았는지 흐릿하게 옮겨담았다.
호아킨 소로야, 해변의 클로틸데, 1904, 캔버스에 유채, 129x150cm, 소로야 박물관
이쯤 소로야가 <바닷가 산책>을 그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삶을 바꿔준 평생의 사랑 클로틸데. 당시로는 죽을병으로도 꼽힌 결핵에서 살아남은 딸 마리아. 이 그림은 소로야에게 있어 기적의 증명이자 훈장이었다. 성공한 화가인 만큼 파티와 사교장의 유혹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봤자 오직 보이는 건 발렌시아 바다, 그리고 나의 가족들.
“세상은 아름다웠다”
떠난 그 뒤로는 수천명 행렬
호아킨 소로야와 클로틸데, 1922~1923 [작자미상]
호아킨 소로야, 해변의 아이들, 1899, 캔버스에 유채, 72x122cm, Fine Arts Museum of Asturias
1923년, 어느덧 예순이 된 소로야.
소로야는 이제 쇠약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린다. 클로틸데. 이번에도 그녀가 있다. 소로야가 그녀를 눈에 한 번 더 담는다. 클로틸데는 그 앞에서 늘 그랬듯 코를 찡긋한다. 햇빛 아래서, 팔짱을 낀 채, 귀한 시간을 귀하게 흘려보낸다. 돌아보니 소로야는 <해변의 아이들> 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 있든, 해변과 가족이 있는 발렌시아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호아킨 소로야, 자화상, 1909, 캔버스에 유채, 41x26cm, 소로야 박물관
소로야는 그해에 생을 마감했다.
사실, 3년 전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겪은 후부터 그는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아름답지만, 자연, 그리고 세상 그 자체도 아름다웠다.” 소로야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도 한다. 자신의 자화상 아래에 본인 이름과 클로틸데의 이름을 함께 썼던 그. 소로야의 장례 행렬에는 시민 수천명이 뒤따랐다. 클로틸데와 자식들은 마드리드 집과 정원을 가장의 미술관으로 개조해 세상에 남겼다. 소로야는 구원받은 것이었다. 빛과 가족, 지지 않는 사랑이란 이름에. 그리고, 남겨진 그의 그림은 이제 구원자가 돼 많은 이의 영혼을 부축하고 있다.
기자의 말풍선
위험한 그림들 [교보문고]
“예술은 인생의 해상도를 높인다.”
후암동 미술관의 2026년 첫 책, <위험한 그림들>이 새롭게 출간되었습니다.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과분한 사랑 덕분입니다.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이번 해에는 더더욱 행복하기로 해요.
참고자료
호아킨 소로야 인생의 그림, 호아킨 소로야, 에이치비 프레스
The Painter Joaquin Sorolla. Peel, E., Philip Wilson Publishers, Ltd.
Sorolla: His Painting and his Family. In E. Peel (Ed.), The Painter Joaquin Sorolla, Sorolla, F. P., Philip Wilson Publishers, Ltd
호아킨 소로야, 발렌시아 해변의 소녀, 1910, 캔버스에 유채, 69x100cm, 개인소장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 온라인릴게임 다. 종종 문학과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초저녁 바다와 두 여인,
아름다운 명화의 속사정
호아킨 소로야, 바닷가 산책(일부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확대), 1909, 캔버스에 유채, 205x200cm, 소로야 박물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이 보인다.
왼쪽은 아내 클로틸데, 오른쪽은 막 열아홉이 된 딸 마리아였다. 계절은 여름, 시간대는 태양이 낙하하는 초저녁이었다. 이곳은 스페인 발렌시아의 엘 카바냘 해변(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Playa de El Cabanyal). 화가가 평생을 가슴에 품은 바다였다. 이날 아내와 딸은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보라색 꽃장식 모자를 챙긴 아내는 이를 머리에 올렸다. 벗은 재킷은 팔에 걸치고, 손으로는 양산 손잡이를 쥐었다. 딸은 옷깃을 목 끝까지 세웠다. 붉은 기의 머리칼은 말아올리곤, 밀짚 챙을 든 팔을 휘적휘적 흔들어본다. 빛이 부서진다. 면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사포 같은 천이 휘날리고, 진주 귀걸이가 반짝인다. 파도는 갈색, 하늘색, 보라색의 색감을 흩뿌린다. 짧은 붓놀림으로 살린 모래사장은 뭉근해보인다. 이런 가운데, 가만 보면 두 사람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호아킨 소로야는 손이 빠른 화가였다. 그림을 눈 깜짝할 새 그린다는 말도 듣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 릴게임추천 로야도 평소 같은 빠르기를 보일 수 없었다. 아내와 딸, 그리고 여름날의 지중해 해안. 이를 더 오래 담아두고 싶었다. 소로야는 종종 붓을 내려놓기도 했다. 또 한 번 목울대가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호아킨 소로야, 바닷가 산책, 1909, 캔버스에 유채, 205x200cm, 소로야 박물관
소로야의 삶은 한때 그늘졌다.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한 시기도 있었다. 자신에게 그것밖에 못해주는 운명을 노려보고, 그따위밖에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한 적 또한 분명 있었다. 그런 인생이 이토록 푸르러질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있으면 “여보”, 그리고 “아빠”라는 말이 바람과 함께 닿았다.
추위를 묻는 아내의 염려, 구두를 신어 다리가 아프다는 딸의 칭얼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1909년, 당시 마흔여섯 살의 소로야가 그린 <바닷가 산책>. 이 그림은 세로 205㎝, 가로 200㎝에 이른다. 해변 풍경화로는 이례적으로 크다. 기어코 일군 찬란함을 실물 크기로 두고 싶은 욕심 때문이리라. 많은 이가 소로야를 해맑은 풍경을 찾아다닌 해변의 화가 정도로 보곤 한다. 그가 위대해진 건 이처럼 예쁜 장면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많다. 아예 틀린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는 그의 겨우 반쪽 모습일 뿐이다. 소로야가 잘 그린 건 또 있었다.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가족.
두 살에 부모 잃은 화가,
벨라스케스·고야에 빠지다
호아킨 소로야, 성유물에 입맞춤, 1893, 캔버스에 유채, 103.5x122.5cm, 빌바오 미술관
소로야는 고아였다.
1863년 발렌시아에서 출생한 소로야는 두 살에 부모를 잃었다. 두 사람은 식료품점을 둔 소박한 상인이었다. 사인은 콜레라였다. 한 해 터울 여동생과 갑자기 황무지에 남겨진 순간이었다. 소로야는 여렸다. 순하고, 눈물도 많았다. 그는 열쇠공인 이모 부부 밑에서 컸다. 나름대로 보살핌도 받았다. 그래도 부모의 사랑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섬세한 그의 가슴에는 서글픔, 또는 처연함과 비슷한 감정이 뿌리를 내렸다. 소로야는 이쯤부터 두 가지 마음을 품었다. 1년 내내 백퍼센트 서로를 위할 수 있는 내 연인을 찾아, 함께 가족을 꾸려보겠다는 소망. 그런 한편, 이는 단지 꿈일 뿐 끝내 이루지 못할 바람일 수 있다는 절망감이었다.
소로야는 아홉 살이 된 해부터 그림을 배웠다.
열여덟 살, 마드리드로 온 그때부터는 프라도 미술관을 수없이 오가며 감각을 키웠다. 그늘진 그의 심금을 울린 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엄숙한 묘사, 프란시스코 고야의 처절한 표현이었다. 소로야는 두 거장의 화풍을 지침으로 삼는다. 그랬다. 어쩌면 그는, 이들의 감성을 따르는 충실한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다.
어린 환자와 죄수, 지친 노동자…
빛 대신 그늘을 그렸던 나날들
호아킨 소로야, 백인 노예 무역, 1895, 소로야 박물관
만틸라(mantilla)를 두른 소녀 넷이 기차 삼등석 칸에 구겨져 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꾸며본 듯하지만, 어딘가 촌스러운 느낌을 감출 수는 없다. 시골에서 도시로. 보다 노골적으로는, 논밭에서 술집으로. 여인들은 그렇게 ‘팔려가고 있다’. 검은 천을 로브처럼 두른 노인은 포주다. 이들의 잡동사니 짐을 곁에 둔 채 감시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소녀들이 도망칠 수 없다는 건 막힌 객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속과 감금의 삶을 마주하리라는 점은 비좁은 간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은밀한 구성, 냉철한 관찰. 이는 벨라스케스의 정신과 맞물린다.제목은, <백인 노예무역>. 1897년, 소로야는 이 그림으로 프랑스 파리 살롱에서 상을 받았다.
호아킨 소로야, 슬픈 유산!, 1899, 캔버스에 유채, 210x285cm, 반카하
꼬마들이 발렌시아 말바로사 해변(Playa de la Malvarrosa)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미 많은 아이는 벌거벗은 채 물을 맞는다. 햇빛을 입에 물고, 파도를 살갗 위로 펴바른다. 곧 해맑은 웃음소리도 들릴 법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이들의 모습이 심상찮다. 대부분은 눈에 띄게 여위었다. 몇몇은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일부는 목발을 짚고 있으며, 두어 친구는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사실, 이들은 인근 요양 병원에서 생활하는 어린이 환자였다. 소아마비, 부모에게 이어받은 선천성 매독 등을 앓고 병약해진 희생자들이었다. 검은 옷의 수도사. 그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일종의 운동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쁜 풍경이 아닌, ‘고통스러운’ 장면인 것이다.
아이들은 눈이 멀거나, 미쳤거나, 장애가 있거나 (…)
이들의 존재가 나에게 통증을 안겼다.
나는 병원장에게 찾아가 말했다.
이 장면을 실물 그대로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훗날 소로야의 회고였다. 솔직한 직시와 거침없는 필치. 이는 고야의 유산과 결이 맞닿는다. 소로야는 마지막 색을 칠한 후 숨을 들이마셨다. 고심 끝에 제목을 붙였다. 그가 얹은 문장은, <슬픈 유산>. 소로야는 이 작품으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호아킨 소로야, 또 다른 마르그리트, 1892, 캔버스에 유채, 130.1x200cm, 밀드레드 레인 켐퍼 미술관
호아킨 소로야, 아직도 생선이 비싸다고 말하는가!, 1894, 캔버스에 유채, 151.5x204cm, 프라도 미술관
소로야는 이 밖에도 남루한 여죄수를 그렸다.
어업 중 갈고리에 걸려 피를 철철 쏟는 소년 어부를,죽어가는 군인과 굶주린 노동자를 붓으로 옮겼다. 그렇게 ‘사회적인’ 작품을 줄줄이 내보였다. 당시 소로야의 손끝은 빛보다는 그늘을 만들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껏 마주한 세상과도 어울려보였다. 하지만, 소로야는 <슬픈 유산>을 끝으로 이토록 절절한 그림 그리기를 사실상 멈춘다. 왜?
클로틸데, 그리고 아이들로 인해
가슴 속 응어리가 녹아 없어지다
클로틸데를 그리는 호아킨 소로야, 1905, 소로야 박물관 [크리스티안 프란젠]
클로틸데 가르시아 델 카스티요. 소로야의 삶을 유채색으로 물들인 여인이었다.
소로야가 클로틸데를 처음 본 건 10대 소년 당시의 한 시절, 햇빛 좋은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미술 학교에서 만난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눈썹이 진했다. 눈매는 우묵했다. 그런데, 웃을 때는 얼굴의 모든 곳이 부드러워졌다. 말씨는 다정했고, 가느다란 손발목이 향하는 곳에는 늘 다정함이 있었다. 나이 차는 두 살. 소로야는 클로틸데의 배려심을, 클로틸데는 그런 소로야의 의젓함을 기쁘게 바라봤다. 소로야는 클로틸데의 아버지 밑에서 잠시 일한 적도 있었다. 당시 클로틸데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했다. 그런 그의 영향 덕분일까. 그녀에게는 흔치 않은 예술적 감성도 있었다. 하지만, 소로야는 그런 클로틸데의 손을 감히 잡지 못했다. 나 따위라는 생각, 싱그러운 햇살에 괜히 그림자를 얹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를 멀찍이 둔 채 군 생활을 했다. 이어서는 곧장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 4년여간 유학 생활을 버텼다. 1888년, 고향 발렌시아로 돌아오니 어느덧 스물다섯. 소로야가 가장 궁금했던 건 클로틸데의 안부였다. 그녀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소식 앞에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알고 보니 그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아킨 소로야, 목욕 후, 1915, 캔버스에 유채, 130x150.5cm, 소로야 박물관
소로야는 그해 클로틸데와 결혼했다. 생애 가장 큰 용기를 낸 순간이었다.
꽃피는 기쁨도 있었지만, 밀려오는 슬픔도 없지는 않았다. 2년 뒤 품은 첫째 딸 마리아.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아슬아슬한 순간도 몇 차례 있었다. 내 사랑이 가난해서인지, 불행의 운명을 거스르려고 한 대가인지,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런 가운데 일을 쉴 수는 없었다. 클로틸데와 마리아를 두고, 이어선 아들 호아킨(1892년 출생)을 남기고, 또 한 번 막내딸 엘레나(1895년 출생)와 떨어진 채 홀로 마드리드 등으로 와야 했다. 마리아가 열이 있다거나, 아들 호아킨이 몸져누웠다(아들도 썩 튼튼하지 못했다)는 식의 소식이 닿을 때면 가슴은 또 타들어갔다.
호아킨 소로야, 어머니, 1895, 캔버스에 유채, 소로야 박물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소로야에게 변함없이 밝은 색채만 건네는 이가 있었다. 클로틸데였다.
클로틸데는 소로야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뿌리 깊은 불안을 끄집어내지도 않았다. 클로틸데에게는 심각한 일을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심각해보였던 많은 일이 실제로는 심각하지 않게 끝을 맺을 때도 많았다. 그녀는 세 아이를 정성껏 보살폈다. 가끔은 소로야에게 부친 편지에서 ‘당신의 못난이’(Tu Fea·뚜 페아)라는 투정 섞인 표현을 붙여 웃음도 이끌었다. 1895년, 그런 클로틸데가 엘레나를 낳고서 함께 잠든 장면. 소로야는, 그 앞에서 무언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 한구석의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클로틸데의 옅은 미소, 언니와 오빠에 이어 또 한 번 기적을 안고 온 아기, 새하얀 솜털 이불…. 색색한 숨소리와 달큰한 살냄새에 폭 젖은 듯한 그림. 제목은 <어머니>였다. 소로야는 표현하기 힘든 벅참, 어딘가 ‘채워지는 듯한’ 그 감정을 화폭에 녹였다.
호아킨 소로야, 해변을 따라 달리기, 1908, 캔버스에 유채, 90x166.5cm, 아스투리아스 미술관
소로야는 자기도 모르는 새 치유받고 있었다.
세상은 잔혹하다. 하지만 가끔은 미치도록 아름답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을 이어가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을 계속 지켜가야 한다. 어둠을 기록하는 일도 가치있지만, 힘겹게 살아남은 빛을 수호하는 일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는 클로틸데와 세 자식이 건넨 울림이었다. 소로야가 <슬픈 유산>을 끝으로 빛을 탐구하게 된 수많은 이유 중 묵직한 하나일 것이다.
나의 기적, 나의 보석함
그리고 또 그려도 좋았다
호아킨 소로야, 나의 가족, 1901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대에게 이미 말했죠.
매번 같은 말만 하게 돼요.
그림을 그리는 일,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
그게 전부랍니다.
호아킨 소로야, 클로틸데에게 쓴 편지 문장 중 일부
미국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까지도 직접 그린 소로야지만, 사실 그는 초상화 작업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다.
대상을 그리려면 각별한 관심부터 가져야 하는데, 그 마음의 문을 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로야가 그리고 또 그린 얼굴. 클로틸데와 자식들이 사실상 유일했다. 소로야는 <슬픈 유산> 직후 <나의 가족>을 내놓았다. 클로틸데의 붉은 드레스, 첫째 마리아의 손, 둘째 호아킨의 눈빛과 막내 엘레나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폭에는 소로야 본인도 있다. 그의 얼굴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다. 붓과 팔레트를 든 소로야의 눈빛은 강렬하다. 기적과도 같은 삶의 보물함 앞에서는, 그 또한 진심 어린 관심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아킨 소로야, 나의 아이들, 1904, 캔버스에 유채, 160.5x230.5cm, 소로야 박물관
호아킨 소로야, 물고기를 바라보는 마리아(건강을 회복하고 있던 시기), 1907, 캔버스에 유채, 81x105.8cm, 런던 그래프턴 갤러리
소로야는 얼마 안 가 또 <나의 아이들>을 작업했다. 자식들은 그사이 더 컸다. 마리아는 꽤 성숙해졌다. 호아킨과 엘레나 또한 제법 점잖아졌다. 내 자식들이 이렇게나 예쁘게 잘 크고 있어요. 이것은 자랑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1906년. 소로야가 마흔셋, 마리아가 열여섯이 된 그해에는 큰 위기가 있었다. 마리아가 결핵에 걸리고 만 것이다. 소로야는 유럽 전시 일정을 일부 취소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고 한다. 마리아가 생기를 되찾을 때까지 울면서 곁을 지켰다고 한다. 소로야는 마리아의 투병, 조금씩 기운을 찾는 모습 등을 화폭에 옮기기도 했다. 마치 곧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양 아름답고, 찬란하게.
호아킨 소로야, 소파에 앉아있는 클로틸데, 1910, 캔버스에 유채, 180x110cm, 소로야 박물관
호아킨 소로야,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클로틸데, 1910, 캔버스에 유채, 150x105cm, 소로야 박물관
내 모든 사랑은 그대에게 쏠려 있어요.
우리 아이들에 대한 큰 사랑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대는 훨씬, 아주 훨씬 더 소중한 존재예요.
(…)
당신은 내 영원한 이상이니까요.
호아킨 소로야, 클로틸데에게 쓴 편지 문장 중 일부
이런 와중에, 소로야의 초상화 세계로 마음껏 입장할 수 있는 특권을 쥔 인물. 맨 앞줄에는 역시나 아내 클로틸데가 있었다.
소로야에게 클로틸데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장르였다. 참을 수 없는 정물이자, 그리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풍경이었다. 소로야는 흰 원피스의 클로틸데가 청순해서, 검은 이브닝드레스의 클로틸데가 매혹적이어서 또 붓을 들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를 보고, 캔버스 속 클로틸데는 소로야를 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 특히 그녀의 깊고 진한 눈을 그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직 그녀뿐, 배경 따위는 잘 보이지도 않았는지 흐릿하게 옮겨담았다.
호아킨 소로야, 해변의 클로틸데, 1904, 캔버스에 유채, 129x150cm, 소로야 박물관
이쯤 소로야가 <바닷가 산책>을 그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삶을 바꿔준 평생의 사랑 클로틸데. 당시로는 죽을병으로도 꼽힌 결핵에서 살아남은 딸 마리아. 이 그림은 소로야에게 있어 기적의 증명이자 훈장이었다. 성공한 화가인 만큼 파티와 사교장의 유혹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봤자 오직 보이는 건 발렌시아 바다, 그리고 나의 가족들.
“세상은 아름다웠다”
떠난 그 뒤로는 수천명 행렬
호아킨 소로야와 클로틸데, 1922~1923 [작자미상]
호아킨 소로야, 해변의 아이들, 1899, 캔버스에 유채, 72x122cm, Fine Arts Museum of Asturias
1923년, 어느덧 예순이 된 소로야.
소로야는 이제 쇠약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린다. 클로틸데. 이번에도 그녀가 있다. 소로야가 그녀를 눈에 한 번 더 담는다. 클로틸데는 그 앞에서 늘 그랬듯 코를 찡긋한다. 햇빛 아래서, 팔짱을 낀 채, 귀한 시간을 귀하게 흘려보낸다. 돌아보니 소로야는 <해변의 아이들> 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 있든, 해변과 가족이 있는 발렌시아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호아킨 소로야, 자화상, 1909, 캔버스에 유채, 41x26cm, 소로야 박물관
소로야는 그해에 생을 마감했다.
사실, 3년 전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겪은 후부터 그는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아름답지만, 자연, 그리고 세상 그 자체도 아름다웠다.” 소로야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도 한다. 자신의 자화상 아래에 본인 이름과 클로틸데의 이름을 함께 썼던 그. 소로야의 장례 행렬에는 시민 수천명이 뒤따랐다. 클로틸데와 자식들은 마드리드 집과 정원을 가장의 미술관으로 개조해 세상에 남겼다. 소로야는 구원받은 것이었다. 빛과 가족, 지지 않는 사랑이란 이름에. 그리고, 남겨진 그의 그림은 이제 구원자가 돼 많은 이의 영혼을 부축하고 있다.
기자의 말풍선
위험한 그림들 [교보문고]
“예술은 인생의 해상도를 높인다.”
후암동 미술관의 2026년 첫 책, <위험한 그림들>이 새롭게 출간되었습니다.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과분한 사랑 덕분입니다.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이번 해에는 더더욱 행복하기로 해요.
참고자료
호아킨 소로야 인생의 그림, 호아킨 소로야, 에이치비 프레스
The Painter Joaquin Sorolla. Peel, E., Philip Wilson Publishers, Ltd.
Sorolla: His Painting and his Family. In E. Peel (Ed.), The Painter Joaquin Sorolla, Sorolla, F. P., Philip Wilson Publisher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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