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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쇤베르크. 화성법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켜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중앙포토]
현대음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아마도 다양성 바다이야기사이트 과 실험성, 새로운 매체와 사회적 메시지 등을 말하리라. 하지만 대중들에게 현대음악은 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고 설명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 현대음악은 어쩌다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을까. 아름다워야 예술이란 통념을 깨버리고 혁신적인 실험을 거 릴게임바다이야기 듭한 결과다. 끔찍했던 두 번의 세계대전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하지만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이 청중의 반응보다 자기들이 하고 싶었던 것에만 매달렸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청중 불신하며 엘리트 대상 ‘사적 연주회’ 철저하게 예술에 몰두했기에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역설. 그 시작은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다신게임 쇤베르크였다. 쇤베르크 이전만 해도 청중들은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야유와 비난을 보낼망정 관심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초연에서의 야유가 나중에 열렬한 환호로 바뀐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기말 현대문명이 낳은 혼란과 공허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예술가들이 인간의 잔혹성이나 산업사회의 불안과 소외라는 어두운 내면을 파고든 반면 릴게임사이트추천 대중들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순간의 쾌락과 말초적 자극을 쫓았다. 그러한 괴리 속에서 쇤베르크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굳게 지켜나갔다.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혐오가 노골화되던 1874년 유럽. 빈의 게토에서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쇤베르크에게 고독은 운명이었다. 8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접하고 음악가를 꿈꿨으 온라인릴게임 나 음악을 배울 형편이 되지 않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혼자 스스로 작곡을 깨우쳤고 놀라운 재능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악 3중주를 혼자 작곡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하지만 1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사설 은행에 취직해야 했고,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배움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뜨겁게 불타올라 저녁마다 문학과 철학을 독학하였고, 음악을 전공하던 다비드 요제프 바흐와 오스카 아들러 같은 또래 친구들로부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웠다.
그렇게 쌓은 실력으로 들어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지휘자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와 절친이 된 것은 쇤베르크의 인생에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기적이었다. 빈 음악원에서 안톤 브루크너 등을 사사한 쳄린스키는 빈 최고의 거장 브람스도 인정한 실력자였고, 쇤베르크가 그토록 목말라했던 정규 음악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897년, 쇤베르크는 빈 음악가협회 회원들 앞에서 쳄린스키의 조언을 받아 완성한 ‘현악 4중주 D장조’를 연주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쇤베르크의 제자 알반 베르크(왼쪽)와 안톤 베베른. 쇤베르크와 함께 ‘신빈악파’를 형성하며 평생의 예술적 동지로 남았다. [사진 사회평론]
쇤베르크의 등장을 가장 반긴 것은 빈의 혁신적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이들은 그가 새 시대를 이끌어갈 천재적인 재목임을 알아보고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말러는 쇤베르크의 밀린 집세까지 대신 내주며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실험들을 열렬히 지지해 주었으며, 슈트라우스 역시 그를 응원하며 작곡 지원금과 강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의 강의는 명성이 높아서 그가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도 몇몇 학생들과는 개인 교습을 이어갔다. 그렇게 가르친 제자가 그와 함께 이른바 ‘신(新)빈악파’를 형성하며 평생의 예술적 동지로 남았던 안톤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예술가들의 평가와 청중의 반응은 시작부터 크게 엇갈렸다. 정식으로 작품 번호를 처음 붙인 Op.1부터 Op.3까지 첫 작품들부터 청중의 거센 항의를 받더니, 유명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조차 초연 기회를 얻지 못해 작곡 후 3년 만에 간신히 무대에 올라서 모욕적인 혹평을 들었다. 이후에도 쇤베르크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갈수록 더 가혹해졌다. 1907년 ‘실내교향곡’ 초연 때는 ‘거칠고 꼴사나운 민주주의자들의 소음’이라는 비판을 받는가 하면 그 이듬해 발표된 ‘현악 4중주 2번’에 대해서는 ‘진짜 엉터리 음악’이라는 논평까지 받았다.
화가이기도 한 쇤베르크가 본인을 그린 ‘푸른 자화상’. [사진 사회평론]
‘현악 4중주 2번’은 그가 쳄린스키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아내인 마틸드에게 헌정한 곡으로, 이때는 바로 그녀가 젊은 화가 게르스틀과 사랑에 빠졌던 시기였다. 쇤베르크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게르스틀이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1악장의 구조적 화성과 조성이 곡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사라져 4악장에 이르면 불협화음이 의무감을 벗고 마침내 해방을 맞는 이 곡의 서사가 의미심장하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제발 돌아오라는 쇤베르크의 간청을 마틸드가 받아들여 결국 가정으로 돌아왔고, 그녀로부터 청혼을 거절당한 게르스틀은 자살로 25년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소신이 지나치면 때로 괴팍해지기도 한다. 1913년, 11년에 걸쳐 완성한 대규모 성악곡 ‘구레의 노래’를 초연했을 때 청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지만, 쇤베르크는 환호에 화답하지 않았고 앙코르 연주도 거부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청중은 몇 주 후 그가 지휘자로 나선 공연에서 야유를 보내며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쇤베르크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반격에 나서면서 연주장은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쇤베르크가 경찰을 부르면서 중단된 이 음악회는 아직도 ‘스캔들 연주회’라는 오명으로 자주 회자된다.
이를 계기로 청중에 대한 그의 불신은 더 커졌고 그는 엄선된 사람들에게만 티켓을 판매하는 ‘사적 연주회’를 조직한다. 현대음악에 비판적이었던 기자와 비평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평론가 입장 금지’라고 써 놓고 진행된 이 음악회의 객석은 음악가·화가·학자·의사 등 엘리트 지식인들로 채워졌다.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작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미를 파악하려고 경청한 이들 덕분에 음악회는 353회나 열렸고, 쇤베르크는 이를 통해 전통적인 조성과의 고리를 한층 더 과감하게 끊는 실험을 계속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1920년대 초. 마침내 12음 기법이 세상에 등장한다. 쇤베르크는 이를 통해 불협화음의 카오스였던 무조성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다. 12음 기법은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반음을 동등하게 간주하여 이들을 모두 사용하되 중복되지 않게 음렬을 하나 만들고 그것을 변형시켜가며 곡 전체의 모든 선율과 화성을 구성하는 작곡법이다. 인간의 예술적인 직관과 감성을 무시한 개념적 이론의 산물이라는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쇤베르크 자신의 말처럼 “향후 100년간 독일 음악을 우월하게 만들 발견”임이 분명했다. 이 기법은 그를 이론적 틀을 갖춘 무조음악의 창시자로 등극시켰고, 그 덕에 그는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불륜 저지른 아내에 ‘현악 4중주 2번’ 헌정 행복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히틀러가 집권하자 나치는 그의 음악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여 금지시켰으며 학교에 그의 해임을 명령했다. 결국 쇤베르크는 서둘러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보스턴 등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UCLA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것. 적지 않은 연봉을 받은 덕에 LA의 고급 주택가인 브렌트우드에 거주하며 가사 도우미까지 두고 사는 호사를 누렸다. 말년은 영예로웠다. 피에르 불레즈,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루이지 노노, 밀턴 배빗과 같은 전후 젊은 세대 작곡가들이 그의 무조음악과 12음 기법에 주목하고 그것에 기반한 총렬주의 음악(음렬 개념을 음높이뿐만 아니라 다이내믹·음색·리듬 등 음의 모든 파라미터에 적용한 음악)을 추구함으로써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추앙 받았기 때문이다.
쇤베르크가 삶을 마감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 음악이 아름답기만 한 장식품이 아니라 진리여야 한다는 그의 음악 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안, 긴장, 두려움, 내적 갈등, 충동을 표출했던 불협화음이 혼돈이 아니라 상실한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가게 종업원도 그의 12음 음악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시대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이 곧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의 곡과 인생은 우리에게 세한고절(歲寒孤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태어난 지 150년이 지나도록 작품이 연주회 레퍼토리에 포함되지 않은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 그의 뒷모습이 그토록 어여뻐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리라.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쇤베르크. 화성법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켜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중앙포토]
현대음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아마도 다양성 바다이야기사이트 과 실험성, 새로운 매체와 사회적 메시지 등을 말하리라. 하지만 대중들에게 현대음악은 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고 설명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 현대음악은 어쩌다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을까. 아름다워야 예술이란 통념을 깨버리고 혁신적인 실험을 거 릴게임바다이야기 듭한 결과다. 끔찍했던 두 번의 세계대전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하지만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이 청중의 반응보다 자기들이 하고 싶었던 것에만 매달렸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청중 불신하며 엘리트 대상 ‘사적 연주회’ 철저하게 예술에 몰두했기에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역설. 그 시작은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다신게임 쇤베르크였다. 쇤베르크 이전만 해도 청중들은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야유와 비난을 보낼망정 관심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초연에서의 야유가 나중에 열렬한 환호로 바뀐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기말 현대문명이 낳은 혼란과 공허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예술가들이 인간의 잔혹성이나 산업사회의 불안과 소외라는 어두운 내면을 파고든 반면 릴게임사이트추천 대중들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순간의 쾌락과 말초적 자극을 쫓았다. 그러한 괴리 속에서 쇤베르크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굳게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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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베르크의 제자 알반 베르크(왼쪽)와 안톤 베베른. 쇤베르크와 함께 ‘신빈악파’를 형성하며 평생의 예술적 동지로 남았다. [사진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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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 대한 예술가들의 평가와 청중의 반응은 시작부터 크게 엇갈렸다. 정식으로 작품 번호를 처음 붙인 Op.1부터 Op.3까지 첫 작품들부터 청중의 거센 항의를 받더니, 유명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조차 초연 기회를 얻지 못해 작곡 후 3년 만에 간신히 무대에 올라서 모욕적인 혹평을 들었다. 이후에도 쇤베르크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갈수록 더 가혹해졌다. 1907년 ‘실내교향곡’ 초연 때는 ‘거칠고 꼴사나운 민주주의자들의 소음’이라는 비판을 받는가 하면 그 이듬해 발표된 ‘현악 4중주 2번’에 대해서는 ‘진짜 엉터리 음악’이라는 논평까지 받았다.
화가이기도 한 쇤베르크가 본인을 그린 ‘푸른 자화상’. [사진 사회평론]
‘현악 4중주 2번’은 그가 쳄린스키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아내인 마틸드에게 헌정한 곡으로, 이때는 바로 그녀가 젊은 화가 게르스틀과 사랑에 빠졌던 시기였다. 쇤베르크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게르스틀이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1악장의 구조적 화성과 조성이 곡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사라져 4악장에 이르면 불협화음이 의무감을 벗고 마침내 해방을 맞는 이 곡의 서사가 의미심장하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제발 돌아오라는 쇤베르크의 간청을 마틸드가 받아들여 결국 가정으로 돌아왔고, 그녀로부터 청혼을 거절당한 게르스틀은 자살로 25년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소신이 지나치면 때로 괴팍해지기도 한다. 1913년, 11년에 걸쳐 완성한 대규모 성악곡 ‘구레의 노래’를 초연했을 때 청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지만, 쇤베르크는 환호에 화답하지 않았고 앙코르 연주도 거부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청중은 몇 주 후 그가 지휘자로 나선 공연에서 야유를 보내며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쇤베르크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반격에 나서면서 연주장은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쇤베르크가 경찰을 부르면서 중단된 이 음악회는 아직도 ‘스캔들 연주회’라는 오명으로 자주 회자된다.
이를 계기로 청중에 대한 그의 불신은 더 커졌고 그는 엄선된 사람들에게만 티켓을 판매하는 ‘사적 연주회’를 조직한다. 현대음악에 비판적이었던 기자와 비평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평론가 입장 금지’라고 써 놓고 진행된 이 음악회의 객석은 음악가·화가·학자·의사 등 엘리트 지식인들로 채워졌다.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작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미를 파악하려고 경청한 이들 덕분에 음악회는 353회나 열렸고, 쇤베르크는 이를 통해 전통적인 조성과의 고리를 한층 더 과감하게 끊는 실험을 계속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1920년대 초. 마침내 12음 기법이 세상에 등장한다. 쇤베르크는 이를 통해 불협화음의 카오스였던 무조성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다. 12음 기법은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반음을 동등하게 간주하여 이들을 모두 사용하되 중복되지 않게 음렬을 하나 만들고 그것을 변형시켜가며 곡 전체의 모든 선율과 화성을 구성하는 작곡법이다. 인간의 예술적인 직관과 감성을 무시한 개념적 이론의 산물이라는 비난이 없지 않았지만, 쇤베르크 자신의 말처럼 “향후 100년간 독일 음악을 우월하게 만들 발견”임이 분명했다. 이 기법은 그를 이론적 틀을 갖춘 무조음악의 창시자로 등극시켰고, 그 덕에 그는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불륜 저지른 아내에 ‘현악 4중주 2번’ 헌정 행복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히틀러가 집권하자 나치는 그의 음악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여 금지시켰으며 학교에 그의 해임을 명령했다. 결국 쇤베르크는 서둘러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보스턴 등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UCLA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것. 적지 않은 연봉을 받은 덕에 LA의 고급 주택가인 브렌트우드에 거주하며 가사 도우미까지 두고 사는 호사를 누렸다. 말년은 영예로웠다. 피에르 불레즈,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루이지 노노, 밀턴 배빗과 같은 전후 젊은 세대 작곡가들이 그의 무조음악과 12음 기법에 주목하고 그것에 기반한 총렬주의 음악(음렬 개념을 음높이뿐만 아니라 다이내믹·음색·리듬 등 음의 모든 파라미터에 적용한 음악)을 추구함으로써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추앙 받았기 때문이다.
쇤베르크가 삶을 마감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 음악이 아름답기만 한 장식품이 아니라 진리여야 한다는 그의 음악 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안, 긴장, 두려움, 내적 갈등, 충동을 표출했던 불협화음이 혼돈이 아니라 상실한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가게 종업원도 그의 12음 음악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시대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이 곧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의 곡과 인생은 우리에게 세한고절(歲寒孤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태어난 지 150년이 지나도록 작품이 연주회 레퍼토리에 포함되지 않은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 그의 뒷모습이 그토록 어여뻐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리라.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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