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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공놀이클럽 제공


가부장적 집안의 성 소수자 아들의 이야기는 흔히 ‘갈등과 단절’ 혹은 ‘극복과 화해’로 귀결된다. 연극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같은 설정을 취하면서도, 가부장적 가족의 또 다른 희생자인 딸을 주목한다. 작품은 성 정체성을 깨닫고 조금씩 본모습을 드러내려는 집안의 장남 남규빈과, 가족의 관심에서 소외된 채 대학 진학을 통해 집을 벗어나는 것만을 삶의 목 농협중앙회전세자금대출 적으로 삼는 재수생 남은빈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배경은 2010년 서울 은평구의 재개발을 앞둔 허름한 수정빌라 203호. 넓은 무대 한중간에 간단한 소도구와 마킹 테이프로 구역을 나눠 옹색하게 재현된 공간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은빈과 규빈은 집의 소유자이자 남아 선호 사상에 사로잡힌 할머니와, 방문 판매로 생계를 2008년 금융위기 책임지는 엄마와 함께 산다. 집 안에는 할머니가 금줄에 꿰어 말려 놓은 고추가 걸려 있다. 아들이 태어나면 금줄에 고추를 걸었던 옛 풍습을 떠올리게 하는 말린 고추는 가부장적 사고의 상징이자,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드러내는 쿰쿰한 냄새의 근원이다. 낡고 허름한 집으로 시각화된 가부장적 체제는 향긋한 복숭아향이 퍼지면서 환기된다. 그저 착하고 효심 깊은 현대스위스 저축은행 적금 오빠라고만 여겼던 규빈이 동생 은빈의 복숭아향 립스틱을 몰래 바르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은빈에게 트랜스젠더임이 들통난 규빈은 커밍아웃을 결심한다. 은빈은 아들만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와 엄마를 이유로 들며 지금처럼 숨겨야 한다고 만류한다. 이해와 지지를 약속하며 설득에 성공한 은빈의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오빠의 커밍아웃으로 대출가능한도 자칫 자신이 집을 떠날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은빈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규빈은 홀가분해지자 점점 과감해진다. 은빈에게 화장과 코디를 부탁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을 갖추는 데 기쁨을 느낀 그는, 내친김에 동생을 졸라 외출까지 시도한다. 우연히 만난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동생 몰래 한 남자에게 연락처를 건네기까지 한다. 하지만 파산비용 짧은 일탈의 행복은 현실의 벽 앞에 멈춰 선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규빈은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중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망설이며 현실을 자각한다. 또한 연락처를 줬던 남자에게 정체가 들통나 폭행을 당하고도 고소조차 못 한 채 오히려 합의금을 물어야 했다. 규빈의 수상한 행동은 결국 엄마에게까지 발각된다.



연극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첫 장면에서 남아 선호 사상에 사로잡힌 할머니를 맡았던 배우가 마지막 장면에선 여성 정장을 입은 장남 규빈으로 등장한다. 공놀이클럽 제공



역할 바꾸기로 보여주는 편견의 전환



연극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동일한 의상으로 상징되는 한 인물을 여러 배우가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공놀이클럽 제공


마침내 가족은 붕괴되고, 할머니와 엄마의 만류에도 규빈이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결말은 단순한 파국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은빈이 가부장적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트랜스젠더인 오빠를 지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규빈 또한 자신의 정체를 감추느라 동생 은빈의 소외를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며 쿰쿰한 가부장제의 냄새가 배어 있는 집을 함께 떠난다. 엄마와 할머니도 집 안 공간을 규정하던 마킹 테이프를 뜯어내고 집을 나서며 연극은 끝난다.
은빈, 규빈, 엄마, 할머니 역을 맡은 네 명의 배우는 장마다 옷을 바꿔가며 다른 역할로 등장한다. 성별도, 체형도 다른 네 배우는 나이도, 성 정체성도 다른 네 역할뿐 아니라 부수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까지 소화한다. 놀이성을 살려 배우들이 배역을 바꿔 출연하는 방식은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각 장마다 배우의 성별과 특성을 살려 역할을 배치했다. 이를테면 맨 처음 남아 선호 사상의 화신처럼 등장한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류세일)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성 정장을 차려입고 가족 앞에 선 규빈을 연기하는 식이다.
강훈구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공놀이클럽의 이러한 연기 방식은 단순히 연극적 놀이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가진 할머니, 엄마, 은빈과 퀴어인 규빈이 결국 다른 존재가 아님을 드러내는 장치다. 한때 성 소수자를 ‘이상하고 괴상한 존재'라며 모욕하던 말이었던 ‘퀴어’가 이제는 차별을 거부하는 이들의 자긍심을 담은 포괄적 개념으로 바뀐 것처럼, 차별을 가하던 주체가 어느 순간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품은 편견과 차별이 전환될 수 있음을 '역할 바꾸기'라는 연극적 방식으로 구현하며, 퀴어와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공연은 2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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