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작가의 회고전 ‘이불: 1998년 이후’가 펼쳐진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기획전시장 들머리 공간. 내리막 진입로 위쪽 천장에 은빛 비행선 모양의 설치 조형물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15~2016)이 매달려 있다. 진입로 오른쪽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건물 외벽 정면 오목 공간에 설치돼 세계적 주목을 받은 4점의 근작 조형물 중 하나인 ‘롱 테일 헤일로: CTCS#1’이 수문장처럼 들어섰다. 노형석 기자


지금 한국 현대미술판을 대표하는 최고 스타 작가는 누구일까?
5~6년 전만 해도 여러 이견이 있었지만, 이젠 한 작가의 이름이 확실하게 거론된다. 바로 ‘여전사’ 별명으로 유모바일 바다 이야기 다운
명한 이불이다. 지난해 갓 환갑을 넘긴 이 여성 작가는 작업 반경과 층위 면에서 국내 다른 작가들을 압도하는 발자취를 그려왔다.
그는 1980~90년대 청년 시절 대학 교정 건물이나 소극장 천장에 로프 줄로 자신의 알몸을 매달고 절규하고, 솜으로 누빈 괴물 형상 조각물을 옷처럼 뒤집어쓰고 한국과 일본 도시 거리를 돌아다니는 전위적 퍼포먼스필룩스 주식
를 벌이면서 삶과 예술행위의 상식을 깼다. 여성주의 미술의 전사로 불리며 정치사회적 현실과 교감하는 90년대 한국 미술의 또 다른 전형성을 일궈냈다.
유학하지 않은 홍익대 조소과 출신의 토종 작가인 그는 2000년대 들어 물밀듯 들어오는 유학파 작가들의 개념미술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문명과 역사, 건축과 미술 등을 통찰하고 조망하면서 강력추천주
난해한 사유를 차곡차곡 형상화한 작품을 계속 내놓았다. 1930년대 불타면서 추락한 힌덴부르크 비행선을 유약한 모양새로 재현한 은빛 설치 조형물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15~2016)이 2000년대 대표작이 됐다.
끊임없이 국내외 미술관과 화랑에서 조각조각 신작들을 발표한 집요한 노력이 절정의 결실로 나타난 건 바로 지난해 뽀빠이 릴게임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진행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벽 정면의 파사드 프로젝트였다. 벽체의 오목 공간 안에 과거의 고전적 인물과 미래·현재의 인물 군상 이미지들이 명징하면서도 모호하게 혼재된 양상으로 출현한 조형물 ‘롱 테일 헤일로’ 연작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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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층 그라운드 갤러리 전시장 일부. 정면에 보이는 복잡한 외관의 조형물은 금속제 뼈대에 유리알과 아크릴 비즈 등으로 된 수많은 체인 줄을 늘어뜨린 얼개를 띠고 있다.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근대적 구상을 재해석한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란 작품이다. 뒤쪽 왼편에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백두산 천지의 장관을 함께 연상하면서 만든 욕조 모양 설치 작품 ‘천지’(2007년 작, 2025년 재제작)가 보인다. 안쪽 벽면에 붙은 그림들은 2000년 이후 작업한 평면 연작들로, 몸 등의 유기적 형태와 기계 같은 이질적 이미지들이 엉겨 붙은 혼성적 특징을 드러낸다. 노형석 기자


이달 초 시작된 이 작가의 회고전 ‘이불: 1998년 이후’가 펼쳐진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기획전시장 들머리 공간은 이런 그의 내력을 단적으로 집약해 표현한다. 내리막길인 슬로프 진입로 천장에 대표작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이 떠 있고, 진입로 오른쪽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벽에 설치됐던 ‘롱 테일 헤일로: CTCS#1’이 수문장처럼 들어서서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주요 작업을 살피며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 모형 등 150여점을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1980~90년대 중후반 전위적인 퍼포먼스 작업 중심으로 미술 여전사 이불의 면모를 부각시켰던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 회고전 ‘이불―시작’의 후속편이다. 예순 갓 넘은 중견 작가가 40년 작가 인생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갈라 한국 대표 공공미술관에서 분산 개최했다는 것부터 전례 없는 일이다.



나무 부재와 거울 등으로 이뤄진 미로 모양의 설치 구조물 ‘비아 네가티바’(2012년 작, 2022년 재제작)의 내부 모습. 각진 거울벽에 비친 관객들의 이미지는 숱한 조각 이미지들로 분절되면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리움미술관 제공


더욱이 전시에서 주요 출품작들의 배경 구실을 하는, 전시실 사방 벽면과 바닥면 전체를 거울과 그 조각들로 빼곡히 채운 대형 설치 작품 ‘태양의 도시’는 2014년 현대차 후원을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이 시작한 중견 작가 대형 기획전 첫 회를 수놓았던 작품이다. 리움의 전시까지 작가는 국내 주요 전시기관 전시를 모두 섭렵하는 그랜드슬램을 이룬 셈이다. 리움미술관 쪽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지난 30여년간 작가의 작업을 선보이는 국내 첫 대규모 전시”라며 “최근작을 포함해 기획된 서베이(작품 조사) 전시로 이후 홍콩 엠플러스뮤지엄 등 주요 국외기관으로 순회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얼어붙은 바다 같은 이 ‘태양의 도시’를 배경으로 상부 블랙박스 전시장에 들어가면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이보그 연작의 일부(‘사이보그 W6’, 2001)와 1999년 베네치아 한국관 출품작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Ⅰ’이란 제목의 노래방 상자 작품을 볼 수 있다. 동서양 고대 신상 조각과 현대 공상과학 애니메이션, 팝아트 등이 융합된 사이보그상은 매끈한 질감과 형상을 지녔으나,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기형이어서 미래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음울한 전망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물론, 사랑을 주제로 한 옛 유행가들이 울려나오는 노래방 또한 이미 20여년 전 작품이란 점에서 무상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라운드 갤러리 안쪽 벽에 붙은 이불 작가의 평면 연작들 가운데 일부인 ‘퍼듀 ⅩⅦ’(2019). 자개와 돌가루 등을 섞은 안료를 화폭에 쌓아 올리고 정교하게 갈아내면서 몸 같은 유기적 형태와 기계 장치의 이미지들이 서로 얽히거나 융합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노형석 기자


지하층 그라운드 갤러리로 내려가면 정면에 복잡한 외관의 조형물이 나타난다. 금속제 뼈대에 유리알과 아크릴 비즈 등으로 된 수많은 체인 줄을 늘어뜨린 얼개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근대적 구상을 재해석한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란 작품이다. 그 뒤쪽에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백두산 천지의 장관을 함께 연상하면서 만든 욕조 모양 설치 작품 ‘천지’(2007년 작, 2025년 재제작)가 보인다. 안쪽 벽면에 붙은 그림들은 2000년 이후 작업한 평면 연작들로, 몸 등의 유기적 형태와 기계 같은 이질적 이미지들이 엉겨붙은 혼성적 특징을 드러낸다.
나무 부재와 거울 등으로 이뤄진 미로 모양의 설치 구조물 ‘비아 네가티바’(2012년 작, 2022년 재제작)의 내부 모습도 흥미롭다. 각진 거울벽에 비친 관객들의 이미지는 숱한 조각 이미지들로 분절되면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를 이룬다. 안쪽 한켠의 벽면은 드로잉과 주요 작품 모형 아카이브 진열장이 높이 10m 이상 올라가면서 빽빽하게 채워져 또 다른 장관을 보여준다.



그라운드 갤러리 한쪽 벽면을 채운 이불 작가의 드로잉과 주요 작품 모형 아카이브 진열장. 노형석 기자


2000년대 이후 도시와 건축, 역사와 인간을 성찰하면서 만든 여러 조형물과 평면 작업들은 기존 한국 현대미술이 지니지 못했던 놀라운 성취이면서 스스로의 지성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쌓아 올린 관념의 축적이자 나열이기도 하다. 그 관념들의 덩어리에 불온하고 역동적인 힘이 충만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작품들에서 그런 에너지는 별반 보이지 않고, 예민한 감성과 공허한 관념들의 집적물이 여기저기 똬리를 튼 모양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사드 설치 작품들은 이불이 새 힘을 불끈 내며 역사와 창조 사이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다는 희망의 조짐을 알려주었지만, 넉점 전체가 아니라 한점만 왔다는 점이 아쉽다. 작가는 뉴욕에서 한점의 작품을 모델링해 가져오기도 어려웠다면서 나머지 작품들은 차후 전시를 통해 차근차근 풀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내년 1월4일까지.



리움미술관 회고전 전시장 들머리에 선 이불 작가. 리움미술관 제공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