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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아온 53년의 시력 동안 정 시인의 언어는 숱한 이들의 입속과 뇌리, 일기장과 편지 위를 맴돌았다. 그가 새로 쓴 시 100편이 이번 신간에 담겨있다는 말에 시집으로 향하는 손을 거둘 수 없었다. 또 어떤 문장이 우리를 울리고 다독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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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패배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12쪽, ‘패배에 대하여’주신왕
중.
줄곧 그의 뒤를 따라온 별명은 ‘슬픔의 시인’. 정 시인은 3년 만의 시집을 여는 첫 작품에서도 패배의 슬픔을 뒤적여 그 속에 묻힌 고마움과 사랑을 건져낸다. 시인의 펜 끝이 닿으면 하나의 이름으로 정의하지 못할 수만 갈래의 얽힌 감정들이 한 구절 한 구절 가지런히 다듬어진다.
‘잃는 것이 얻는 것이라고/ 심장에 인터넷백경
칼이 꽂힌 채 눈길을 걸으면/ 부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만이 내 손을 잡아준다(‘어리석음에 대하여’)’며 업신여겨지는 선한 이를 감싸고, ‘이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이 이별이 되는 순간/ 이별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추락’)’라고 헤어짐의 아픔도 승화한다. 숱한 설움을 끌어안는 다정한 역설은 그가 주식투자방송
가진 또 다른 별명이 ‘위로의 시인’임을 수긍하게 만든다.
어두운 감정의 골에서 쉼 없이 작은 빛무리들을 길어 올린 50여년. 정 시인은 직전작 ‘슬픔이 택배로 왔다’의 출간 이후 자신의 샘이 말라 시를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물과 밥을 먹어야 하듯 시인도 죽지 않으려면 시를중국식품포장 주식
생각하고 써야 했다”며 “시를 쓰기 시작하자 말라버린 샘에 조금씩 물이 고였고, 꾸준히 퍼내자 샘이 마를 듯 마르지 않아 이 시집을 출간하게 됐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시인의 말’에 쓴 고백처럼 차오르기에 묶어낸 시집일 뿐이라 표현하기에는, 그의 샘이 짙푸를 만큼 더욱 깊어진 물빛을 띤다. 표제작 ‘편의점에서 잠깐’은 복잡미묘한 심리를 포착하는 시인의 눈길이 더 다양한 각도로 사람의 속내를 살피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당신은 아직도/ 겸손의 손으로 캔맥주를 들고/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나는/ 교만의 손으로 컵라면을 들고 그리운 눈인사를 나누며//(…)//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 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한다/ 편의점에서 사랑을 판매한다 해도/ 할인가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 23쪽, ‘편의점에서 잠깐’ 중.















화자는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며 각자 손에 쥔 것을 따로 계산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마음과 ‘그토록 미워했던 마음’은 판매도 구매도 못 할 불량품으로 남았다. 시인은 편의점이라는 일상적 배경에 서글픔과 애틋함, 원망과 공허의 색을 상상력으로 칠해 입혔다.
책의 추천사를 남긴 김승희 시인은 ‘낯익은 시인이자 낯선 시인이고 오래된 시인이자 새로운 시인’이라며 정호승 시인의 또 다른 명칭을 지었다. 문학 담당 기자가 되고 책판의 기사를 꾸릴 때마다 선택한 책과 저자에게 꼭 맞는 소개를 쓰고 싶다는 욕심에 매달 긴 시간을 골몰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무리 고심해도 그만큼 달라붙는 말이 없어 김 시인의 표현을 인용해 책을 내민다. 익숙한 감동과 처음 보는 입체적 시선으로, 50년 지기 벗의 얼굴과 생판 모를 초면을 동시에 갖춘 그의 시집이 가을밤을 지새울 여운을 전한다.

저자 정호승, 출판 창비, 200쪽, 가격 1만3000원
장유진 기자 ureal@knnews.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