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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인상을 은 66번을 현정에게 원망은 거짓말을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조명자]
1987년 초, 죽음을 예감한 혜숙이 하루는 남편한테 경제상황을 고백했다.
"당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집안을 잘 건사했어야 하는데 이런 말을 해서 파칭코사이트
미안해. 당신 월급과 상여금은 꼬박꼬박 수령해서 수배 중인 동지들 도와주고... 그러다 보니 빚을 많이 지게 됐어. 여보 나 돈 때문에 피가 말라 죽을 지경이야. 죽고 난 다음에 나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들 원망을 생각하면 끔찍하고 소름이 끼쳐. 여보 집과 약국 처분해 나 죽기 전에 빚 좀 갚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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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건강했던 때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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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를 넘기다
빚 장부를 보니 갚을 돈이 4800만 원가량이었다. 41평 집과 약국 임대보증금을 합하면 5천만 원 정도, 빚 갚고 남은 2백으로 여섯 식구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 아무 말도 못 하는 남편에게 혜숙이 울며불며 매달렸다증권대출
. 마침내 최민화가 결단을 했다.
"우선 약국부터 정리해 급한 불 끄고. 이 집은 어머니 명의로 돼 있으니 마음대로 팔 수도 없고. 내가 당신 보는 앞에서 어떻게든 일 년 안에 빚 다 갚을게. 그 대신 당신 1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빚 남겨두고 죽으면 안 돼."
막내가 엄마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두 돌 때까지만이라도카지노릴게임
, 남편이 빚을 다 갚을 일 년은 버텨야 한다는 치열함이 그 험한 방사선, 항암도 견뎠지만, 병원 치료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까지 내려가 기치료에 겨자찜, 거풍, 냉온욕, 몸에 좋다는 요법은 무엇이든 했지만 혜숙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혜숙이 죽게 됐다는 소리를 듣고 목사님들이 오셔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7월 첫째 주 조승혁 목사님이 교인과 함께 심방을 오셨다. 이번이 마지막 임을 예감한 혜숙은 목사님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하나님, 왜 이 여인을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하나님 뜻에 따라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어 온 의로운 여인입니다. 주여!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할 일 많은 이 여인을 살려주시옵소서."
혜숙이도 최민화도 교인도 모두 엎드려 통곡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목사님도 기도 중에 배와 등허리 쪽으로 심한 통증을 느끼셨단다. 그날 혜숙은 모처럼 편안한 잠에 빠졌다. 전엔 없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에미야, 배가 고프다고? 뭘 먹고싶어? 무슨 반찬을 해줄까?""조기 반찬이 먹고싶어요."
말기암을 견디고 살아난 오혜령 작가의 수기에서 마지막으로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린 후 '죽으면 죽으리라' 마음을 가다듬고 제일 먼저 먹고 싶었던 음식이 조기였다던데. 혜숙도 그 사람처럼 소생하고 싶었다. 먹고 바로 토하고 또다시 먹고. 사투가 벌어졌다. 그래도 혜숙은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중단했던 풍욕과 냉온욕도 다시 시작했다.
감사기도를 하다 보니 저 대신 살림과 육아를 몽땅 짊어지신 어머니한테 고마워하기는커녕 짜증내고 미워한 것이 사무치게 후회됐다. 저 잘났다고 오만했던 행동도 반성했다. 남이 상처를 받든 말든 입바른 소리를 틱틱 내뱉던 시건방진 행동도. 회개기도를 하면서 마음도 편안해졌고 사소한 것에도 기쁨과 감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체중도 500g 늘었다. 인쇄소 '나눔기획'을 창업한 남편이 약속대로 일 년도 안 돼 빚을 모두 청산하면서 혜숙의 건강도 훨씬 좋아졌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언니는 오진일 거라고 했다. 그 상태에서 살아남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 첫째 딸 둘째 아들 남편 최민화 시어머니와 함께 설악산 여행 중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암에 이어 찾아온 중증 근무력증
정치 국면이 바뀌었다. 구속된 민청련 간부들 중 김근태만 빼고 모두 석방됐다. 새로운 투쟁열기로 세상은 들썩였고 나눔기획도 일감이 늘어 매일 야근을 할 정도로 번창을 했다.
전두환은 후임으로 노태우를 임명한다는 4.13호헌선언을 했다. 학생, 청년,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전두환의 호헌 선포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반독재 가두시위가 전국으로 불타올랐다.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져 한 달만에 숨지는 비극이 발생하면서 거센 시위는 불에 기름을 끼얹듯 전국민으로 확대됐다. 처음으로 넥타이부대가 거리를 메웠다.
전 국민의 성난 반대시위로 마침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민주정부 수립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양김이 분열했다. 따라서 재야도 후보단일화와 김대중 비판적 지지로 분열됐다.
격동하는 시간 속에서도 최민화는 사업에만 집중했다. 혜숙이 완치판정을 받을 때까지 오로지 아내 건강과 사업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두고는 YS, DJ 양진영 캠프에서 홍보물 주문이 쏟아졌다. 직원과 설비가 늘어나고 매출은 고점을 찍었다.
빚도 다 갚고, 나눔기획은 성장을 거듭하고. 혜숙도 건강이 좋아져 34kg 체중이 48kg으로 오르고. 세상은 뒤숭숭했지만 혜숙 부부는 행복했다. 형편이 풀린 남편은 승용차를 구입해 혜숙을 태우고 산이고 계곡이고 온천이고 좋다는 곳은 모두 찾아 전국을 누볐다.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야!' 뒷자리에 김희택 부부를 태우고 양구, 인제 땅굴도 구경하고 펀치볼 투어도 했다.
모든 게 술술 풀리자 혜숙은 따뜻한 아파트에서 편히 살고 싶었다. 남편에게 졸랐더니 아파트 대신 새집을 짓자고 해서 임시로 방 두 개 달린 반지하로 옮기고 건축을 시작했다.
그 사이 조승혁 목사님한테 부자들만 받는다는 유명한 안마사를 소개받아 매일 2시간씩 안마도 받았다. 안마를 받은 지 한 달이나 됐을까. 혜숙이 갑자기 숨을 못 쉬겠다고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오른쪽 눈꺼풀이 내려앉아 잘 보이지도 않고 얼굴이 저리고 입술이 뻣뻣하게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말할 때마다 침이 흐르고 소리가 새어 나오면서 점점 목까지 마비되더니 호흡 곤란이 일어났다.
119로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서 바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암이 재발됐나 했는데 중증 근무력증이란 결과가 나왔다. 숨을 못 쉬니까 산소호흡기를 끼고 그래도 안 되면 기관지확장 주사를 맞았다. 그 주사를 맞으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소변이나 분비물이 쏟아졌다. 숨을 쉴 수 없을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차라리 죽겠다고 창문에 매달리며 발광을 했다.
30일 동안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호흡을 돕기 위해 기관지확장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항암과 방사선으로 끈적해진 피를 깨끗한 피로 바꾸려고 혈액투석기를 이용해 피갈이도 했다. 나중에는 비대해진 흉선을 제거하는 대수술까지 받았다. 갈비뼈를 양쪽으로 쫙 가르고 그사이 비대해진 흉선을 잘라낸 뒤 다시 갈비뼈를 모으기 위해 광목줄로 온몸을 꽁꽁 동여매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침대에 결박했다. 묶어 놓고 기도와 방광, 양쪽 갈비뼈 밑으로 분비물을 배출해 내는 호스를 8개나 주렁주렁 매달았는데 그 형상이 사람 같지 않았다.
사무실 일로 조금 늦어 최민화는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남편이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린 혜숙도 섭섭함과 미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의식을 찾은 혜숙이 필담으로 분노와 증오를 쏟아놓았다.
"당신은 내가 수술할 때마다 왜 곁에 없는 거야? 애들 둘 낳을 때도 그렇고. 그게 제일 가슴에 맺혀. 당신 식구들은 음식도 맛있게 잘 먹고 건강하지? 나 때문에 피곤하지? 내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지?"
어지러운 세상에, 하나 둘 지는 별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혜숙은 중환자실 한 달, 일반병실 보름만에 퇴원해 새집으로 돌아왔다. 꿈에 그리던 쾌적한 집. 혜숙은 커튼이고, 주방시설이고 하다못해 화장실 비누곽 칫솔통 슬리퍼까지 제가 직접 선택하겠다고 했다.
▲ 박혜숙의 혜민약국은 MBC에서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촬영지였다. 당시 세민약국에서 주연배우 신애라 연기 모습.
ⓒ 없음
근무력증도 호전됐고 다시 평온한 일상이 찾아왔다. 암수술 2년. 중증암환자는 5년이 아니라 2년을 마의 벽으로 보는데 혜숙이 마의 벽을 넘은 것이다. 그날, 혜숙이 남편에게 말했다.
"나 암으로는 안 죽을 거야. 이런 말 해도 어떨지 모르지만 나 암 다 나았어."
암이 다 나았다니. 최민화가 반색을 하고 물었다.
"지난 번 근무력증으로 입원해 있을 때 검사받은 거야? 주치의가 그래? 나았다고?"
암세포가 없어 검사해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혜숙이 말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혜숙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말을 안 했는데 마지막으로 조 목사님이 우리 집에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가신 그날 밤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
꿈인지 생시인지 하나님의 성스러운 형상이 나타나더란다. 환한 얼굴로 "여인아! 이제 네 뱃속이 깨끗해지고 네 몸속에 병이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말라".
아무리 예수님 말씀이라도 명색이 약사인데 선뜻 믿어지겠나. 믿지 못하는 혜숙 앞에 예수님이 십자가 모양으로 배를 쫙 갈라 보이시더니 "보아라. 네 몸속에 암세포가 다 없어지고 깨끗하게 낫지 않았느냐?" 하시는데 직접 보니까 정말로 암세포가 보이지 않더란다.
아무튼 믿든 믿지 않든 절망의 끝자락에서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아내 혜숙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이런 긍정 마인드라면 5년 아니, 몇십 년이 대수일까.
박혜숙 부부는 험난한 파고를 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격랑 속이었다.
87년 12월 17일, 대통령선거 개표를 하는 과정에서 구로구청 부정투표함이 시민들한테 발각됐다. 구로구청 현장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현장을 지휘하던 김병곤이 다시 구속됐다. 민청련사건으로 춘천교도소에서 2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지 다섯 달밖에 안 된 사람이.
영등포교도소 수감 중에 소화도 안 되고 배에 뭔 볼록한 것도 잡히고. 증세가 날로 악화돼 외래진료를 요청했지만 교도소 당국은 촉탁 외과의사 처방으로 소화제만 줬다. 교도소와 싸움 끝에 외래진료를 받았는데 악성 진행성 위암으로 판정이 나왔다. 그 길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와 2년간 투병을 했지만 1990년 12월 6일 끝내 눈을 감았다.
88년 6월, 마지막으로 김근태 전의장도 가석방으로 풀려났지만 세상 특히 재야운동권은 뒤숭숭했다. 양 김의 분열을 막기는커녕 재야도 양 진영으로 갈라져 갈등하는 사이 민주정부 수립에도 실패했다. 모두가 좌절과 회한으로 숨을 죽였다.
91년, 제14차 총회에서 민청련이 해산결의를 했다. 민청련의 정신은 이범영이 이끄는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즉 한청협으로 계승발전한다는 고별사를 남기고.
암도 이기고, 중증근무력증도 물리치고, 혜숙의 건강은 날로 좋아졌다. 체중이 50kg까지 오를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혜숙은 남편에게 약국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졸랐다. 91년 추석 무렵, 약국 문을 닫은 지 4년 반 만에 혜숙은 세민약국을 다시 찾았다. 매일 아침 8시에 셔터 문을 열어 밤 10시에 닫는 강행군도 마다할 정도로 신이 나서 일했다.
혜숙은 건강한 일상을 찾았지만 가슴 아픈 일들은 또 일어났다. 기나긴 수배와 옥고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앞뒤 안 보고 민주화운동에만 매진을 하던 이범영이 담도암으로 쓰러져 일 년 남짓 투병 끝에 세상을 떴다. 94년 8월 12일, 광복절 범민족대회를 며칠 앞두고.
▲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 박혜숙 묘 앞에 세워진 표지판
ⓒ 민청련동지회
"왜 살려놔서 이 고생을 시키냐?"
관리약사까지 둘 정도로 약국은 잘됐지만 그동안 누적된 피로로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근무력증으로 퇴원한 지 2년 만에 갑상선 기능저하로 다시 입원했다. 갑상선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혜숙의 건강은 날로 나빠져 50kg까지 늘었던 체중이 다시 38kg으로 줄었다.
갑상선으로 퇴원한 지 일 년도 안 된 95년 3월에 또다시 입원했다. 검사를 해보니 당뇨와 초기결핵 합병증이 왔다는 것이다. 호흡기병실에 입원해 두 달만에 퇴원했지만 꺾여진 건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99년 말까지 한 해에 두어 차례 응급실로 실려가기 일쑤였고 2000년에 들어서선 한 해에 두어 번 입퇴원을 반복했을 만큼 건강이 악화됐다. 당뇨로 위아래 이가 반 이상 빠져 틀니까지 할 정도로.
93년, 김종필과 야합한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군부독재정권을 거쳐 비록 한나라당 정권계승이지만 처음으로 민간인이 당선된 것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격렬한 투쟁도 시들해졌다. 재야시민단체의 결속과 위상도 무너졌다. 재야인사들은 앞다퉈 정치권으로 방향을 틀었다. 88년 몇몇 재야인사가 DJ가 이끄는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96년, 마침내 김근태 전의장도 민주당 의원 뱃지를 달았다.
그 대열에 혜숙의 남편 최민화도 합세했다. 김근태 의원계로 공천을 따내 수원 권선구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정치인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혜숙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으로 월급 약사를 시작했다. 근무를 하면서 쓰러지기도 한두 번이 아니니 계속 다닐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고3인 딸이 심한 우울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벌이는 없고 빚만 늘고. 아이들 학비며 생활비, 이자, 혜숙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스가 끊겼다, 아이들 학원비가 밀렸다. 눈만 뜨면 사방에서 돈을 구하는 게 혜숙의 일상이었다.
딸이 퇴원하면 어미가 입원하고, 어미가 퇴원하면 딸이 다시 입원하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위로차 들른 나에게 혜숙이 소리를 질렀다.
"야, 그때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려놔서 이 고생을 시키냐?"
빚처럼 무서운 것이 있을까. 허우적댈수록 더 빠져드는 진흙덩이 늪속에 서서히 가라앉던 박혜숙. 2004년 9월 3일,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남기고 혜숙은 눈을 감았다.
▲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 박혜숙의 묘. 나중에 최민화가 별세하자 둘이 합장되었다.
ⓒ 민청련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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