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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역 인근 ‘작은 마을’서 어린 시절
“네집 내집 없이 이웃과 의존하며 지내”
“피아노·미술학원 많아… 예술에 끌려”





지난달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내 스튜디오에서 ‘아임 프롬 인천’ 취재팀과 인터뷰하고 있는 구혜선. 2025.10.21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통신비‘아임 프롬 인천’ 62번째 초대 손님은 구혜선이다. 배우 구혜선, 영화감독 구혜선, 화가 구혜선, 작곡가 구혜선, 작가 구혜선, 발명가 구혜선, 기업가 구혜선처럼 별다른 수식 없이도 누구나 아는 그 ‘구혜선’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구혜선의 이름을 검색하면 최근에는 그가 발명하고 특허까지 취득한 ‘납작한 헤어롤’과 ‘벤처기업 설립’ 관련 뉴스가 쏟아 특수관계자 진다. 그 직전에는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는 모습이 화제를 모으며 뉴스가 이어진다.
이 같은 단편들로 구혜선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구혜선이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우리는 구혜선을 잘 안다고 하곤 한다. 물론 이는 스타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 세법개정안 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구혜선’이라는 주제로 모교인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연한 적도 있다. 이번 인터뷰의 주제는 ‘인천 출신 구혜선’이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떠오른 ‘인터넷 얼짱’, 2004년 시트콤 ‘논스톱5’로 데뷔해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2009년 롯데캐피탈 인터넷대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금잔디 역으로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지금 구혜선은 스스로 스포트라이트에서 살짝 비켜서서 음악, 미술, 글쓰기, 영화 연출 등 다양한 매체로 자신을 표현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학문적 호기심이 강한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다.



베네딕도수녀회 배우 구혜선이 지난 10월 21일 인천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에서 경인일보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5.10.21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지난달 21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 내 스튜디오에서 구혜선을 만났다. ‘아임 프롬 인천’에서 구혜선은 차분하고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간 구혜선의 기저에는 그동안 말을 아껴왔던 ‘고향 인천’이 담겨 있음을 이번에 새로이 발견하게 됐다. 구혜선이 지난해 말 ‘제30회 카이스트 문학상’을 수상한 수필 ‘가난하지 않았던 나의 동네’부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가난을 몰랐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인천 백운역과 미군 부대 인근의 작은 마을이었다. 지방 곳곳에 살던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도시에서 일하기 위해 서울과 인접한 곳의 직장을 찾아다니다 결국 미군 부대나 남동공단의 노동자로 취직하여 이 터에 모여 살게 되었다.
우리 마을은 흙으로 지은 집들을 지나, 또 세 자매라는 이름의 문방구를 지나, 콩나물과 두부를 직접 키우고 만들어 팔던 두 개의 구멍가게와 비디오 가게를 지나, 양념 통닭집과 곱창 전골집에서 풍기는 매콤하고 고소한 향기를 참아야만 도착할 수 있는 맨 가장자리, 구석진 곳에 있었다.’
(구혜선 수필 ‘가난하지 않았던 나의 동네’ 중)


백운역 인근 소박하고 따스했던 마을



어린 시절 구혜선과 그의 어머니. /엔에스이엔엠 제공


1984년 인천에서 태어난 구혜선은 6살 무렵부터 부평에서 자랐다. 그가 수필에서 ‘마을’이라 부른 동네는 여전히 백운역 인근에 있다. 현재 그 지역 일대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곳곳에 들어섰는데, 구혜선이 자란 동네는 주택재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되지 않아 낡고 소박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엄청 장난꾸러기였어요. 육아 난이도가 높은 여자아이였습니다. 어릴 때는 이웃들하고 다 같이 사는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프라이버시 같은 게 없었잖아요. 지방에서 올라온 분들이 많아 가족이 멀리 있고 의존할 데가 없으니, 이웃과 의존하고 지냈죠. 그냥 ‘네 집이 내 집이다, 내 집이 네 집이다’하고 살았어요.”

유년기는 따스했던 기억들이다. ‘옆집 아저씨가 일하는 미군 부대에서 남은 도넛을 상자로 얻어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입에 빵 하나를 물고, 양손엔 똑같은 빵 하나씩을 들고, 또 주머니에 빵을 구겨 넣고서 먹을 것을 빼앗기기 싫은 새끼 고양이인양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거나 ‘동네 이웃들은 이러한 마을 구조를 닮아 자연스럽게 공동 육아를 하였고 아이들 모두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고 쓴 수필처럼 구혜선은 작고 소박한 마을에서 가난을 몰랐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를 유년기의 기억과 가족에게서 찾는다.



어린 시절 구혜선(위)과 언니. /엔에스이엔엠 제공


“백운역 쪽에 어린이 뮤지컬 극장이 있었어요. ‘아기 공룡 둘리’ 같은 뮤지컬도 본 기억이 나고요. 1980년대, 1990년대가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였거든요. 피아노 학원도 많고, 미술 학원도 많았는데, 그곳에서 선생님과 놀면서 배웠어요. 사춘기를 강하게 겪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예술적인 부분에 꽂힌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에서 감독·화가·작곡가·작가로





부평여고시절 ‘인터넷 얼짱’ 팬덤 형성
잠시 가수 연습생 생활후 연기자로 데뷔
‘열아홉 순정’ ‘꽃보다 남자’ 잇단 흥행


구혜선은 부평여자고등학교 재학 중 인터넷 팬덤이 생겨났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문화가 활성화하면서 구혜선을 비롯한 이른바 ‘인터넷 얼짱’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스타가 탄생했다.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얻은 구혜선은 연예기획사에서 잠시 가수 연습생 생활을 하다가 2004년 TV 시트콤 ‘논스톱5’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당시 청소년들에게 ‘캠퍼스의 낭만’을 동경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후 TV 드라마 ‘열아홉 순정’(2006~2007), ‘왕과 나’(2007~2008), ‘최강칠우’(2008), ‘꽃보다 남자’(2009) 등 연이은 흥행작의 주연을 맡으며 연예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데뷔 초반에는 크게 고생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요즘처럼 유튜브 같은 것도 없고 텔레비전이 주요 매체였잖아요. 20대 때 출연했던 작품들을 시간이 조금 지나 객관적으로 다시 보고 있어요. 저를 성공하게 해준 작품들이었으니, 어느 작품 하나를 특별하다고 꼽기가 어렵네요. 다시 보니 모두 애착이 가는 작품들입니다.”




배우 구혜선이 지난 10월 21일 인천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에서 경인일보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5.10.21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구혜선은 2008년 단편 ‘유쾌한 도우미’를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단편영화는 물론 ‘요술’(2010), ‘복숭아 나무’(2012), ‘다우더’(2014) 등 장편영화도 꾸준히 선보이며 총 13편의 영화를 제작·연출했다. 개인전 ‘탱고’(2009)를 시작으로 미술, 뉴에이지 피아노 앨범 ‘숨’(2009)을 시작으로 음악, 그리고 소설·에세이를 쓰며 작가로서 보폭을 넓혔다. 다재다능하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지만, 구혜선은 모든 활동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많은 분들이 저의 활동이 다양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저한테는 그게 다양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은 ‘이건 음악이야, 미술이야, 소설이야’라고 하면서 매체 간 영역을 쫙쫙 긋지만, 저한테는 채널이 다를 뿐이지 사실상 같은 영역이에요. 같은 것을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죠. 저의 이야기가 움직이면 영상이 되는 것이고, 고정해 놓으면 그림이 되고, 풀어 놓으면 소설이 되고, 또는 음악이 되는 것이에요. 저는 제 작품을 재활용하는 것을 좋아해요. 제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다시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도전적이고 자생력 강한 고향 닮아





장·단편 영화 13편 연출… 피아노 앨범도
카이스트 석사 과정 ‘공학 전공’ 입학
“영상도 AI 필수… 와보니 예술가 많아”


학생 구혜선은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이다. 2011년 성균관대 예술대학 영상학과에 입학해 오랫동안 휴학하다가 2020년 복학해 다시 학업에 집중했다. 지난해 2월 대학을 최우등(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가을 카이스트 과학저널리즘대학원 공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예술 전공자가 공학도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2011년 영상학과는 말 그대로 영상을 촬영하는 법을 배웠는데, 2020년대에 복학하니 전부 다 디지털화돼 있었어요. 인공지능(AI)과 코딩은 필수적이고, 지금은 코딩까지 AI가 해주니까요. ‘여기가 공대인가, 예술대학인가’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어요. 학부 시절 공대와 융합 수업을 했는데,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카이스트를 선택한 것은 나와 관계없는 세계를 탐구하고 싶은 생각이었죠. 카이스트에 와보니 오히려 공대에 예술가가 많더라고요.”



배우 구혜선이 지난 10월 21일 인천 부평아트센터의 한 스튜디오에서 경인일보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구혜선은 최근 둥글게 말린 헤어롤을 펴서 편리하게 보관한다는 발상으로 ‘납작한 헤어롤’(쿠롤)을 개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쿠롤로 특허를 취득하고, 이를 상품화하기 위해 최근 벤처기업 ‘스튜디오 구혜선’을 설립했다. 헤어롤 모델이 되거나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등 직접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특허 취득한 ‘납작 헤어롤’ 직접 사업화
“이것저것 너무 많이 한다지만 각기 다른
언어로 연결된 제 이야기”


“헤어롤을 포함해 제가 만든 콘텐츠들을 문화적 비즈니스로 확장하고자 벤처를 설립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쟤 너무 이것저것 하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저에게는 다 연결된 활동이에요. 아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는데, 말하자면 저는 ‘구혜선이라는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이니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체만 다를 뿐 저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영화를 촬영할 때 감독이 ‘롤, 액션!’이라는 말을 하는데, 헤어롤도 롤이잖아요? 그렇게도 스토리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웃음)”






배우 구혜선이 지난 10월 21일 인천 부평아트센터의 한 스튜디오에서 경인일보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5.10.21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구혜선은 자신이 영화와 드라마에서 맡았던 그 어떤 배역보다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텔레비전 안에서만 구혜선을 본 사람은 그의 강함을 알 수 없다. 긴 이야기 끝에 구혜선은 “명함처럼 ‘나 인천 여자야’라고 말한다”고 했다. 유년의 기억은 그의 버팀목이다.
“인천이 고초가 많고 풍파를 많이 겪은 곳이잖아요. 황해와 갯벌이 가지는 날것의 느낌도 강하고요. 많은 사람이 섞여 살고, 많은 문화가 섞여 있는 동네예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저는 강합니다. 도전적이고 자생력이 강한 게 인천 사람인 것 같아요. 저의 자생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인천이 분명하게 있는 것 같아요.”


‘공동의 공간에서 삶은 나의 유년 시절의 모든 것이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나는 또 다른 가족의 의미를 배웠다. 또한 사랑을 배불리 먹으며 자라났으므로 인간에게 낙심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여전히 인간을 신뢰하고 사랑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단 한 번도 가난한 적이 없었다고 감히 나의 시간을 정의해 본다’.
(구혜선 수필 ‘가난하지 않았던 나의 동네’ 중)





배우 구혜선이 지난 10월 21일 인천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에서 경인일보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5.10.21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1984년 인천 출생
■학력 및 경력: 인천부평초, 부흥중, 부평여고, 성균관대 예술대학 영상학과 졸업,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과학저널리즘대학원 석사 재학 중, 구혜선 필름 대표, (주)스튜디오 구혜선 대표
■영화 제작·연출: 단편 ‘유쾌한 도우미’(2008), ‘당신’(2010), ‘기억의 조각들’(2012), ‘백구’(2013), ‘미스터리 핑크’(2018), ‘다크 옐로우’(2021), ‘스튜디오 구혜선_그리고 봄’(다큐멘터리·2024), 장편 ‘요술’(2010), ‘복숭아 나무’(2012), ‘다우더’(2014), 실험영화 ‘딥슬립’(2018)
■정규 앨범과 싱글 앨범: ‘숨’(뉴에이지 피아노·2009), ‘숨2’(2015), ‘그리고 봄’(2016), ‘숨3’(2020), ‘숨4’(2021), ‘20주년 구혜선 베스트 뉴에이지’(2022), 디지털 싱글 ‘갈색머리’(2009), ‘기억상실증’(2013) 외 다수
■주요 전시 개인전: ‘탱고’(2009·라메르), ‘잔상’(2012·예술의전당), ‘구혜선 개인전’(2013·상하이문화원), ‘구혜선 개인전’(2013·홍콩 GALLERY BY THE HARBOUR), ‘구혜선 개인전’(2016·예술의전당), ‘니가 없는 세상. 나에겐 적막’(2019·진산갤러리), ‘다시 또다시’(2020·진산갤러리), 단체전·특별전 ‘아티스타전’(2010), ‘레드불 아트 프로젝트’(2013), 서울아트쇼(2017) 외 다수
■주요 저서: 소설 ‘탱고’(2009), ‘복숭아 나무’(2012), ‘눈물은 하트 모양’(2019), 에세이 ‘나는 너의 반려동물’(2019), ‘구혜선 시나리오집: 마리 이야기 & 미스터리 핑크’(2018), ‘구혜선 악보집’(2017)
■주요 수상: ‘KBS 연기대상 신인연기상’(2006), ‘SBS 연기대상 뉴스타상’(2007), ‘제26회 부산 아시아 단편 영화제 관객상’(2009), ‘K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우수연기상’(2009), ‘제14회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디자인부문 지식경제부장관상’(2012), ‘제6회 서울노인영화제 청년감독상’(2013), ‘제13회 대한민국 사회공헌 대상 서울시장상’(2018), ‘제24회 쇼트쇼츠 국제단편영화제 관객상’(2022), ‘제30회 카이스트 문학상’(2024)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