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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인류멸망에 가요.하면서 외면하며 써 자신을 난[이완우 기자]
▲ 임실 소충사 앞 풍경, 이석용 의병부대의 활동 무대의 중심이었던 삼봉산(왼쪽 산)과 오른쪽 고덕산 능선
ⓒ 이완우
지난 11일 여명의 시간, 전북 임실 성수면 소충사의 정문인 검증완료릴게임 숭의문 앞 진달래의 붉은 단풍잎에 서리가 살짝 내렸다. 서릿발의 냉기를 이기고 분홍색 진달래가 호국 영령의 기상처럼 생기를 머금고 피어 있었다. 이날 임실 옛길걷기모임의 출발을 앞두고 기자 홀로 소충사의 순국 의병의 비석을 참배했다.
구한말 정미의병 때 임실 이석용(1878~1914) 의병부대의 순국 의병 중에는 소년 바다신릴게임 과 승려가 있었다. 이들 순국 의병의 이름을 비석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이날 임실 '의병의 길'에서 의동과 의승이란 이름으로 산야에 쓰러진 영령을 기리며, 그 의로운 행적을 조명해 보고 싶었다(관련 기사 : 소년이 항일 의병 되기까지... 때를 기다린 사연).
이름을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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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 소충사 이석용 의병부대 비석, (좌상) 의동(義童) 박철규(朴哲圭) (우상) 의동 허천석(許天錫) (좌하) 의승(義僧) 봉수 바다신2 다운로드 (鳳洙) (우하) 의승 덕홍(德弘)
ⓒ 이완우
이석용 의병부대는 1907년 9월부터 1909년에 의진을 해산할 때까지 전북 임실, 진안, 장수와 남원 일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건개하며 황금성오락실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석용 의병장과 의병의 28위의 비석을 확인했다. 비석의 오른쪽 하단에 희미하게 남은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 모셔진 순국 의병 28위의 비석 중에 의동(義童) 박철규와 허천석, 의승(義僧) 봉수와 덕홍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소년과 승려가 의병이란 이름으로 산과 들에 쓰러진 의미를 새겨보고 싶었다.
글씨가 희미하지만, '朴哲圭', '許天錫', '鳳洙', '德弘'의 한자 이름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의동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은 이석용 의병부대의 의병으로 참여한 연령 미상의 청소년으로 보인다. 의승 봉수(鳳洙)와 덕홍(德弘)은 성수산 상이암의 승려라고 기록에 나온다.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2014년)에 박철규와 허천석이 "이석용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음력 10월 8일에 진안 용담(龍潭)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 순국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석용 의병장이 직접 쓴 진중일기(陣中日記)인 <창의일록(倡義日錄)>에는 1907년 9월 16일에 운장산 내원사 계곡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기록이 나온다. 이 전투에서 포장(捕將) 박만화(朴萬華), 소년 박철규와 허천석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다(음력 1907년 9월 16일은 양력으로 10월 21일이다).
이들 어린 의병들은 이석용 의진이 진안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시작한 진안 용담의 내원사 계곡의 첫 전투에서 함께 순국했다. 안타깝다. 이 어린 의동들의 생년월일도 알려지지 않았다.
<임실군지>(1997년판)에 따르면 의승(義僧) 봉수와 덕홍은 1908년 3월, 전북 임실 성수면 '대운치 전투'에서 덕홍 봉수 포함 16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석용 의진 내에서 승려들은 기밀 연락을 담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이석용 부대에 참여하여 순국한 이들 의병의 이름을 소중히 기억하는 것이 임실 '의병의 길'을 걷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앞으로 임실 '의병의 길'을 걸을 때마다 임실 소충사에 모셔진 28위 순국 의병들의 행적을 차례로 찾아보며 그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 임실 삼봉산 죽전마을 이석용 의병장 출생지
ⓒ 이완우
▲ 임실 삼봉산 신덕마을, 신덕마을에서 양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양암마을, 양암마을에서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 이완우
같은 날 오전 8시 30분, 임실 옛길걷기모임의 참가자 다섯 명이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앞에 모였다. 이곳 삼봉산 아래 죽전마을은 이석용 의병장의 출생지이다.
의병장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동쪽으로 직선거리 1km의 도화동 추감재 재실의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다. 의병장은 서당 훈장의 딸과 혼인하여 추감재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500m 위치에서 살았다.
옛길 걷기 일행은 이석용 의병장의 출생지를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가까운 신덕마을로 길을 잡았다. 옛날에 의병장이 도화동으로 바로 걸어 다녔던 옛 산길은 없어졌다. 신덕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양암마을이다.
이 마을은 햇볕이 잘 드는 볕바위가 있어서, 양암(陽巖)마을이라고 한다. 양암마을에서 고갯길을 한참 올라가 도화동으로 향하는 고갯마루를 넘었다. 도화동 아늑한 곳에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터가 있는데, 집 한 채가 온전하게 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삼봉산 아래 너른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행복했을 의병장의 평화로운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이석용 의병장 생가터
ⓒ 이완우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추감재, 이석용 의병장의 어린 시절 서당
ⓒ 이완우
29살의 선비 이석용은 1907년 8월 26일에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다. 이 강토를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마음으로 의병 창의를 결심한다. 같은 해 8월 28일에는 선조의 무덤에 고유제를 지내고 결의를 다진다. 9월 12일에 마이산 남쪽 용암(龍巖)에서 고천제를 지냈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항일 무장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삼봉산 도화동의 추감재 서당 앞들에는 커다란 왕버들나무가 있다. 이곳 도화동 추감재 재실의 옆집에 사는 주민 윤재만(86)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용 의병장이 어린 시절에 서당에 다니면서 수백 년 수령의 왕버들나무 아래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 왕버들나무가 어느 해 폭풍으로 쓰러지고, 그 쓰러진 나무의 끝 가지가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나무로 자랐다. 그 나무가 100년 수령의 현재 왕버들나무라고 한다. 이곳 삼봉산 아래 도화동의 풍경은 봄이면 흐드러진 복숭아꽃이 장관이라고 한다. 가을의 옛길에서 보는 도화동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임실 옛길을 걷는 일행은 도화동의 가을 풍경 속에 서서, 이석용 의병부대의 역사 이야기를 서로 이어가면서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추감재 앞들에서 잠깐 걸으며 고개를 넘으면 대왕마을에 이른다. 이곳은 오래 전에는 대운마을이었는데, 대왕마을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장군이 이 마을을 지나갔다는 설화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1908년 3월 21일, 비가 퍼붓듯 내리는 중에 이석용 의병부대는 이 대왕마을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의병부대 뒤를 밟아왔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의병부대는 화승총이 비에 젖어 쏠 수가 없었고,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공격해 왔다. 의병부대는 수세에 몰렸고 군사를 수습하여 물러났다.
3월 22일, 이석용 의병장을 따르는 병사가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대왕마을에서 전사자가 16명, 잡혀간 자가 2명이고 부상자가 3명 발생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쪽으로 4km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수산 상이암의 봉수와 덕홍 승려 의병 두 명이 전사하였다. 이석용 의병부대가 가장 피해를 크게 입은 전투 장소였다.
"흩어져도 뜻은 영원하리라"
▲ 임실 이석용 의병부대 운현전적지인 대왕마을
ⓒ 이완우
▲ 임실 운현전적비
ⓒ 이완우
정미의병(1907~1909) 당시, 전국적으로 봉기한 의병들과 일본군 사이의 무기 화력의 큰 차이는 그대로 전투력의 격차였다. 의병들의 주력 무기는 조선 구식 화승총이나 개조 조총 수준이었으나, 일본군은 아리사카식 보병총 등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총기의 탄약 등 보급도 의병들은 매우 부족했고, 일본군은 군수창에서 충분히 공급되었다.
그러나 항일 투쟁에 참여한 의병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항일 의병들의 정신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626~681)의 마음일 것이다. 문무왕은 자기가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고 유언하여, 경주 동해안에 해중릉(海中陵)인 문무대왕릉이 조성되었다. <조선태조실록>에는 고려말 명장 이성계 장군의 왜구 척결의 뜻이 기록되어있다.
討倭乃將之職, 愛民乃國之本. (토왜내장지직, 애민내국지본.)
왜구를 무찌름은 곧 장수의 직분이고, 백성을 사랑함은 곧 나라의 근본이다.
임실 이석용 의병장은 1914년 4월 28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그가 의진 중에서 남긴 서간(書簡)에서 그의 올곧은 뜻을 알 수 있다(<정재선생문집> 1961년).
勿以成敗論是非, 惟當盡忠於國耳, 我軍雖散, 志不滅, 他日或可再起也.
(물이성패론시비, 유당진충어국이, 아군수산, 지불멸, 타일혹가재기야.)
성공과 패배의 시비를 논하지 말라. 오직 나라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우리 의병이 흩어져도, 뜻을 영원하리라. 훗날 다시 일어날 날이 있을 것이다.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옛길에서 시간을 잊은 의병 이야기
ⓒ 이소영
▲ 임실 삼봉산 도화동 구절초 ⓒ 이완우
이곳 대왕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좁은 고갯길을 700m쯤 오르면, 임실과 진안을 연결하는 국도 제30호선을 만난다. 옛날에 대운치(운현)로 오르는 고갯길이었을 이 국도변에 운현전적의혼추모비(雲峴戰跡義魂追慕碑)가 있다. '운현 전투의 자취와 의로운 넋을 기리는 비(碑)'라는 의미이다.
이곳 추모비에서 금남호남정맥에서 분기한 성수지맥을 넘는 운현 고개의 안부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 고개 안부의 왼쪽에 주걱봉이 우뚝하고 오른쪽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의 오래된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운현전적의혼추모비에서 고덕산 동쪽 기슭의 임실 관촌면 구암마을로 바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이 있다. 구암마을은 임실 삼봉산 정상에서 산줄기 따라 북쪽으로 1.5km의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이석용 의병부대가 몇 번 지나갔던 마을이다.
1960~1970년대에 널리 불렸던 동요 '이순신 장군'(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이 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을 거북선 앞세우고 무찔렀다. 원수를 갚으면 여한이 없겠으니, 이 몸을 바치겠다, 하늘에 빌었다. 한산섬 달밤에 잠 이루지 못하고, 나라 걱정 시름 하던 이순신 장군'. 이런 내용이 동요 3절 전련(前聯)이다.
이 동요 3절의 후련(後聯)은 '이순신 장군 본받아 우리도 씩씩하게 자란다. 남해의 꽃 이순신 장군 길이 빛내리다. 오늘도 이순신 장군 생각하고, 우리도 겨레를 위해 살렵니다'라는 내용이다. 앞으로 임실 옛길 걷기에서 '의병의 길'을 탐방하며 걸을 때는 이 '이순신 장군'의 동요를 불러도 좋겠다. 가을이 깊어 가는 오는 11월 말, 임실 옛길걷기모임의 '의병의 길' 탐방이 예정되어 있다.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아름다운 가을 고갯길, 이석용 의병장 생가터, 왕버들나무, 대왕마을로 가는 고갯마루
ⓒ 이완우
▲ 임실 삼봉산 도화동 풍경
ⓒ 김유미
덧붙이는
▲ 임실 소충사 앞 풍경, 이석용 의병부대의 활동 무대의 중심이었던 삼봉산(왼쪽 산)과 오른쪽 고덕산 능선
ⓒ 이완우
지난 11일 여명의 시간, 전북 임실 성수면 소충사의 정문인 검증완료릴게임 숭의문 앞 진달래의 붉은 단풍잎에 서리가 살짝 내렸다. 서릿발의 냉기를 이기고 분홍색 진달래가 호국 영령의 기상처럼 생기를 머금고 피어 있었다. 이날 임실 옛길걷기모임의 출발을 앞두고 기자 홀로 소충사의 순국 의병의 비석을 참배했다.
구한말 정미의병 때 임실 이석용(1878~1914) 의병부대의 순국 의병 중에는 소년 바다신릴게임 과 승려가 있었다. 이들 순국 의병의 이름을 비석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이날 임실 '의병의 길'에서 의동과 의승이란 이름으로 산야에 쓰러진 영령을 기리며, 그 의로운 행적을 조명해 보고 싶었다(관련 기사 : 소년이 항일 의병 되기까지... 때를 기다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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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 소충사 이석용 의병부대 비석, (좌상) 의동(義童) 박철규(朴哲圭) (우상) 의동 허천석(許天錫) (좌하) 의승(義僧) 봉수 바다신2 다운로드 (鳳洙) (우하) 의승 덕홍(德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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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의병부대는 1907년 9월부터 1909년에 의진을 해산할 때까지 전북 임실, 진안, 장수와 남원 일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건개하며 황금성오락실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석용 의병장과 의병의 28위의 비석을 확인했다. 비석의 오른쪽 하단에 희미하게 남은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 모셔진 순국 의병 28위의 비석 중에 의동(義童) 박철규와 허천석, 의승(義僧) 봉수와 덕홍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소년과 승려가 의병이란 이름으로 산과 들에 쓰러진 의미를 새겨보고 싶었다.
글씨가 희미하지만, '朴哲圭', '許天錫', '鳳洙', '德弘'의 한자 이름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의동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은 이석용 의병부대의 의병으로 참여한 연령 미상의 청소년으로 보인다. 의승 봉수(鳳洙)와 덕홍(德弘)은 성수산 상이암의 승려라고 기록에 나온다.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2014년)에 박철규와 허천석이 "이석용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음력 10월 8일에 진안 용담(龍潭)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 순국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석용 의병장이 직접 쓴 진중일기(陣中日記)인 <창의일록(倡義日錄)>에는 1907년 9월 16일에 운장산 내원사 계곡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기록이 나온다. 이 전투에서 포장(捕將) 박만화(朴萬華), 소년 박철규와 허천석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다(음력 1907년 9월 16일은 양력으로 10월 21일이다).
이들 어린 의병들은 이석용 의진이 진안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시작한 진안 용담의 내원사 계곡의 첫 전투에서 함께 순국했다. 안타깝다. 이 어린 의동들의 생년월일도 알려지지 않았다.
<임실군지>(1997년판)에 따르면 의승(義僧) 봉수와 덕홍은 1908년 3월, 전북 임실 성수면 '대운치 전투'에서 덕홍 봉수 포함 16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석용 의진 내에서 승려들은 기밀 연락을 담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이석용 부대에 참여하여 순국한 이들 의병의 이름을 소중히 기억하는 것이 임실 '의병의 길'을 걷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앞으로 임실 '의병의 길'을 걸을 때마다 임실 소충사에 모셔진 28위 순국 의병들의 행적을 차례로 찾아보며 그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 임실 삼봉산 죽전마을 이석용 의병장 출생지
ⓒ 이완우
▲ 임실 삼봉산 신덕마을, 신덕마을에서 양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양암마을, 양암마을에서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 이완우
같은 날 오전 8시 30분, 임실 옛길걷기모임의 참가자 다섯 명이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앞에 모였다. 이곳 삼봉산 아래 죽전마을은 이석용 의병장의 출생지이다.
의병장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동쪽으로 직선거리 1km의 도화동 추감재 재실의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다. 의병장은 서당 훈장의 딸과 혼인하여 추감재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500m 위치에서 살았다.
옛길 걷기 일행은 이석용 의병장의 출생지를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가까운 신덕마을로 길을 잡았다. 옛날에 의병장이 도화동으로 바로 걸어 다녔던 옛 산길은 없어졌다. 신덕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양암마을이다.
이 마을은 햇볕이 잘 드는 볕바위가 있어서, 양암(陽巖)마을이라고 한다. 양암마을에서 고갯길을 한참 올라가 도화동으로 향하는 고갯마루를 넘었다. 도화동 아늑한 곳에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터가 있는데, 집 한 채가 온전하게 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삼봉산 아래 너른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행복했을 의병장의 평화로운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이석용 의병장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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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 삼봉산 도화동 추감재, 이석용 의병장의 어린 시절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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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의 선비 이석용은 1907년 8월 26일에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다. 이 강토를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마음으로 의병 창의를 결심한다. 같은 해 8월 28일에는 선조의 무덤에 고유제를 지내고 결의를 다진다. 9월 12일에 마이산 남쪽 용암(龍巖)에서 고천제를 지냈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항일 무장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삼봉산 도화동의 추감재 서당 앞들에는 커다란 왕버들나무가 있다. 이곳 도화동 추감재 재실의 옆집에 사는 주민 윤재만(86)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석용 의병장이 어린 시절에 서당에 다니면서 수백 년 수령의 왕버들나무 아래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 왕버들나무가 어느 해 폭풍으로 쓰러지고, 그 쓰러진 나무의 끝 가지가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나무로 자랐다. 그 나무가 100년 수령의 현재 왕버들나무라고 한다. 이곳 삼봉산 아래 도화동의 풍경은 봄이면 흐드러진 복숭아꽃이 장관이라고 한다. 가을의 옛길에서 보는 도화동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임실 옛길을 걷는 일행은 도화동의 가을 풍경 속에 서서, 이석용 의병부대의 역사 이야기를 서로 이어가면서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추감재 앞들에서 잠깐 걸으며 고개를 넘으면 대왕마을에 이른다. 이곳은 오래 전에는 대운마을이었는데, 대왕마을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장군이 이 마을을 지나갔다는 설화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1908년 3월 21일, 비가 퍼붓듯 내리는 중에 이석용 의병부대는 이 대왕마을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의병부대 뒤를 밟아왔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의병부대는 화승총이 비에 젖어 쏠 수가 없었고,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공격해 왔다. 의병부대는 수세에 몰렸고 군사를 수습하여 물러났다.
3월 22일, 이석용 의병장을 따르는 병사가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대왕마을에서 전사자가 16명, 잡혀간 자가 2명이고 부상자가 3명 발생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쪽으로 4km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수산 상이암의 봉수와 덕홍 승려 의병 두 명이 전사하였다. 이석용 의병부대가 가장 피해를 크게 입은 전투 장소였다.
"흩어져도 뜻은 영원하리라"
▲ 임실 이석용 의병부대 운현전적지인 대왕마을
ⓒ 이완우
▲ 임실 운현전적비
ⓒ 이완우
정미의병(1907~1909) 당시, 전국적으로 봉기한 의병들과 일본군 사이의 무기 화력의 큰 차이는 그대로 전투력의 격차였다. 의병들의 주력 무기는 조선 구식 화승총이나 개조 조총 수준이었으나, 일본군은 아리사카식 보병총 등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총기의 탄약 등 보급도 의병들은 매우 부족했고, 일본군은 군수창에서 충분히 공급되었다.
그러나 항일 투쟁에 참여한 의병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항일 의병들의 정신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626~681)의 마음일 것이다. 문무왕은 자기가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고 유언하여, 경주 동해안에 해중릉(海中陵)인 문무대왕릉이 조성되었다. <조선태조실록>에는 고려말 명장 이성계 장군의 왜구 척결의 뜻이 기록되어있다.
討倭乃將之職, 愛民乃國之本. (토왜내장지직, 애민내국지본.)
왜구를 무찌름은 곧 장수의 직분이고, 백성을 사랑함은 곧 나라의 근본이다.
임실 이석용 의병장은 1914년 4월 28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그가 의진 중에서 남긴 서간(書簡)에서 그의 올곧은 뜻을 알 수 있다(<정재선생문집> 1961년).
勿以成敗論是非, 惟當盡忠於國耳, 我軍雖散, 志不滅, 他日或可再起也.
(물이성패론시비, 유당진충어국이, 아군수산, 지불멸, 타일혹가재기야.)
성공과 패배의 시비를 논하지 말라. 오직 나라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우리 의병이 흩어져도, 뜻을 영원하리라. 훗날 다시 일어날 날이 있을 것이다.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옛길에서 시간을 잊은 의병 이야기
ⓒ 이소영
▲ 임실 삼봉산 도화동 구절초 ⓒ 이완우
이곳 대왕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좁은 고갯길을 700m쯤 오르면, 임실과 진안을 연결하는 국도 제30호선을 만난다. 옛날에 대운치(운현)로 오르는 고갯길이었을 이 국도변에 운현전적의혼추모비(雲峴戰跡義魂追慕碑)가 있다. '운현 전투의 자취와 의로운 넋을 기리는 비(碑)'라는 의미이다.
이곳 추모비에서 금남호남정맥에서 분기한 성수지맥을 넘는 운현 고개의 안부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 고개 안부의 왼쪽에 주걱봉이 우뚝하고 오른쪽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의 오래된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운현전적의혼추모비에서 고덕산 동쪽 기슭의 임실 관촌면 구암마을로 바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이 있다. 구암마을은 임실 삼봉산 정상에서 산줄기 따라 북쪽으로 1.5km의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이석용 의병부대가 몇 번 지나갔던 마을이다.
1960~1970년대에 널리 불렸던 동요 '이순신 장군'(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이 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을 거북선 앞세우고 무찔렀다. 원수를 갚으면 여한이 없겠으니, 이 몸을 바치겠다, 하늘에 빌었다. 한산섬 달밤에 잠 이루지 못하고, 나라 걱정 시름 하던 이순신 장군'. 이런 내용이 동요 3절 전련(前聯)이다.
이 동요 3절의 후련(後聯)은 '이순신 장군 본받아 우리도 씩씩하게 자란다. 남해의 꽃 이순신 장군 길이 빛내리다. 오늘도 이순신 장군 생각하고, 우리도 겨레를 위해 살렵니다'라는 내용이다. 앞으로 임실 옛길 걷기에서 '의병의 길'을 탐방하며 걸을 때는 이 '이순신 장군'의 동요를 불러도 좋겠다. 가을이 깊어 가는 오는 11월 말, 임실 옛길걷기모임의 '의병의 길' 탐방이 예정되어 있다.
▲ 임실 삼봉산 도화동 아름다운 가을 고갯길, 이석용 의병장 생가터, 왕버들나무, 대왕마을로 가는 고갯마루
ⓒ 이완우
▲ 임실 삼봉산 도화동 풍경
ⓒ 김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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