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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생각했다. 단정하게 쓸데없는 문들이 안에서 얘길해야했다.지난겨울 중국 베이징에서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업체를 소개하고 있는 강지현 새샘 대표.
개마고원에서 중학생 소녀는 매직 머리에 후드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모두 북한 당국이 단속하는 차림새였다.
마을 사람들은 “쟤는 ‘황색 바람’에 젖어 버린 이상한 애야. 저런 날라리와 같이 놀지 마”라며 자식들을 단속했다. 학교에서 아무리 비판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 간부였던 부친은 딸 교육을 잘 못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수시로 써야 했다.
3년에 한 벌씩 주는 교복은 받을 야마토무료게임 때는 훌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다. 소녀는 집에서 혼자 교복을 줄였다 늘였다 했다. 친구들과 몰래 한국이나 외국 드라마를 볼 때면 늘 패션에 눈이 갔다. “우리도 저렇게 입고 살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로부터 20년 뒤, 그 소녀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 만든 옷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어쩌면 패션을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 바다이야기부활 른다.
하지만 이 꿈을 완성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난 운명을 거스르고 탈북해 서울에 정착해서 빈주먹으로 일어서야 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열심히 가다 보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것을….
릴게임사이트
한국 생활 초기인 2010년, 해외 의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회장의 그리스 의상 설명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강지현 대표.
● 개마고원의 청바지녀
강지현은 199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가 릴게임예시 4세 때 평양에서 상하수도 관련 기관 간부였던 할아버지가 뭔 잘못을 했는지 하루아침에 가족과 함께 함북 청진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시골이 아닌 큰 도시로 간 것으로 보아 정치 범죄는 아닌 듯싶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잘못을 속죄한다는 의미로 백두산 건설 돌격대에 자원해 3년 동안 일했다. 당국의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후엔 양강도 백암군 임 릴게임야마토 업사업소 당 간부로 임명됐다. 개마고원의 울창한 산림과 깨끗한 강이 소녀의 놀이터였다.
그가 패션에 눈을 뜬 것은 11세 때 할아버지와 고모들이 사는 청진으로 가면서부터였다. 딸이 산골에서 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친은 그를 청진으로 유학 보냈다.
큰 무역회사 부기원(경리)으로 일하는 고모들은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고모들은 당시 청진에 대량으로 들어오는 일본 중고 옷을 넘겨받아 장마당에 팔았다. 강 씨의 고종사촌 언니들은 중고 옷 중에 마음에 드는 옷들을 골라 입었다. 물론 북한 당국이 통제하는 패션들이었다.
사촌 언니들이 크면 그 옷들은 자연스럽게 강 씨에게 전달됐다. 어느 순간 강 씨도 언니들처럼 옷을 골라 입기 시작했다. 몰래 보는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옷들을 눈여겨봤다가 비슷한 것이 나오면 골라냈다.
북한 당국의 옷차림 통제는 시기별로 들쑥날쑥했다. 죽일 것처럼 통제하다가, 아예 손을 놓고 있기도 했다. 강 씨가 청진에 살던 때는 통제가 약해진 때였다. 학교에 입고 가서는 안 됐지만, 10대 초반 소녀가 방과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 후 부친이 와서 딸을 데리고 개마고원으로 돌아갔다. 촌 동네에선 아무리 조신하게 입는다고 입어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마을 사람들은 단체복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강 씨의 끼는 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까’ 고민하면서 머리를 고데기로 펴거나 염색하기도 했다. 외부 세계를 모르는 개마고원 주민들과, 많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외부 문물을 접한 강 씨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멋 내기 좋아하고 잘 노는 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슨 짓을 하건 이상하다고 했다. 모두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하게 사는 그를 부러워하는 학생도 주변에 적지 않았다.
푸른 숲과 강은 개마고원에서 자란 강지현 대표 가슴을 언제나 설레게 한다.
● “석 달만 중국에 살고 싶어”
2007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친은 딸을 청진에 있는 3년제 경제전문대학 부기학과에 다니게 했다. 경리 일을 하며 잘사는 고모들처럼 살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산으로 계산하는 일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 학기만 다니고 개마고원으로 돌아왔다.
그때쯤 북한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북한 과학기술 수준을 높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후계자 김정은에게 젊은 인재를 많이 남겨 주고 싶어서였는지, 북한에서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고위 계층 자녀의 해외 유학을 허용한 것이다.
부친은 이 기회를 활용해 강 씨를 중국에 유학 보내기로 작정했다. 부친은 평양을 오가며 열심히 선을 찾아 로비했고 뇌물도 적잖게 썼다. 강 씨는 해외 유학생 선발 시험을 6번이나 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두 떨어졌다. 뇌물 먹은 간부는 강 씨가 불합격하면 뇌물을 다시 돌려줬다.
유학 준비를 하면서 지역 출판물 보급소에 취직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신문이나 책을 작은 도서관들에 나눠주는 일이었다. 중앙에선 북한 영화나 드라마, 음악을 넣은 CD도 내려왔는데,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CD 배포를 담당한 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북한에서 보급하는 CD는 한국이나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 눈이 높아진 강 씨 성에 차지 않았다. 몸은 북한에 있었지만 어느새 머리는 바깥세상에 살고 있었다. 바야흐로 18세. 한창 꿈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
어느 날 강 씨는 잘 알고 지내는 3세 위 동네 오빠에게 속을 터놓았다. 그 오빠는 중국에 잘사는 친척들이 있었고, 합법적인 여행증을 받아 중국을 여러 번 다녀왔다.
“오빠, 우리 부모님 모르게 날 좀 중국에 데려다 주면 안 돼? 딱 석 달만 구경하고 싶어.”
“정말 가 보고 싶어? 정 원하면 내가 구경시켜 줄게.”
그렇게 둘은 중국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오빠 친구까지 합세했다.
압록강이 강이 꽁꽁 얼어붙은 2008년 12월, 21세 두 청년과 강 씨는 길을 나섰다. 집에는 청진 고모네 집에서 석 달 정도 놀고 오겠다고 말해 승낙을 받았다.
그 오빠는 중국을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다. 셋은 차를 얻어 타고 삼지연으로 갔다. 경비대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오빠가 전화를 하니 연변에 사는 오빠 이모가 차를 끌고 마중 나왔다. 남들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탈북이었다.
지난달 말 서울 강남구 자신의 그림 전시회 ‘다결랩소디’에서 꽃다발을 안고 있는 강지현 대표.
● 중국 대학에 입학하다
오빠 이모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교사였는데, 집에 가 보니 매우 잘 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과 한국 교회에서 돈을 지원받아 북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지낸 한 달은 꿈만 같았다.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선 한국 드라마를 원 없이 봤다.
백화점에는 드라마에서 본 옷들이 다 있었다. 중국 아가씨들은 한겨울에도 코트 안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어떤 옷을 입든 통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화점에 가 보고 강 씨는 시쳇말로 눈이 돌아갔다. 처음엔 한두 달 놀다가 개마고원 집에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런 강 씨의 심경 변화를 눈여겨보던 오빠 이모가 한 달쯤 뒤 제안했다.
“북에 다시 돌아갈래, 아니면 중국에서 대학 다닐래?”
가뜩이나 집에 돌아가기 싫었는데,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졌던 대학 생활을 중국에서 하게 해 준다니 꿈만 같았다.
2009년 1월 강 씨는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국적이 없는’ 그가 중국 대학에 정식 입학할 순 없었다. 대신 50대 초반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3년제 대학 ‘할빈아청대’에 들어갔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선교 목적으로 설립한 어학원 성격의 학교 아닌가 싶다. 한국 기독교계에 발이 넓은 그 이모 덕분에 탈북민 신분으로 학교 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학교는 하얼빈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변두리 도시에 있었다.
강 씨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가 입학한 중국어학과 같은 반에는 한국에서 온 청년도 넷이나 있었다. 3명은 강 씨보다 나이가 많았고 부산에서 왔다는 한 명은 어렸다. 강 씨는 한국에 온 뒤 “나, 부산 사나이야”를 입에 달고 살던 2세 어린 그 청년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한국 오빠들’은 강 씨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데, 대학에 다닐 거면 한국에서 다녀야지.”
4개월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고 방학을 맞았다. 3개월만 하겠다던 중국 살이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집에선 딸이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돌아가면 감옥행이었다. 이렇게 된 것,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 이모에게 전화해 “한국으로 보내 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이모는 이번에도 대책이 있었다. 하얼빈 어느 교회에서 경기 부천에서 온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보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이 선교사는 사람을 더 모아서 8월에 한국으로 한 팀을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7명이 모였다.
강지현 대표는 평범한 삶을 즐기는 시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나를 왜 미워하지?”
한국에 도착하는 과정도 순탄했다. 그해 8월 말 출발해 중국 남부 지방을 거쳐 라오스로 갔고, 거기서 태국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버스, 승용차, 배를 번갈아 타며 방콕에 도착한 뒤 이민국 감옥에 들어갔다.
당시는 한 해에 탈북민이 3000명 가까웠다. 감옥에 들어간 강 씨는 탈북민이 그렇게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감방에 여성 120명이 수감돼 있었다.
19세의 여리여리한 그를 보고 먼저 온 ‘기가 세 보이는’ 언니들이 “넌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대학에 다니다가 왔다고 하니 모두 표정이 바뀌었다.
“우리가 어떤 개고생을 당하며 여기에 왔는데, 이렇게 편하게 오는 애도 있네.”
텃세인지 질투인지 모를 구박과 따돌림이 시작됐다. 그의 자리는 화장실 옆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드나들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기름진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점점 야위어 갔고 기도 팍 죽었다. 살면서 처음 해 보는 고생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니 드디어 출발 순번이 돌아왔다. 공항에 갔는데 이번엔 어려 보이는 한국인 인솔자가 탈북민들에게 반말로 고래고래 폭언을 퍼부었다.
“야, 너네 한국에 가지 않을 거야? 조용히 해.”
그 사람을 떠올리면 강 씨는 지금도 치가 떨린다.
“왜 그 자식은 우릴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죄인도 아닌데 말이죠.”
‘내가 지금 제대로 된 나라에 가는 건지’ 싶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어떻게 비행기에 탔고, 어떻게 공항에 내렸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2009년 11월 2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추운 날이었다. 그와 탈북민들은 버스에 타고 어디론가 가서 건강검진부터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조사기관에 들어갔다.
안 좋았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조사받으며 점차 바뀌었다. 시설도 좋고 방도 따뜻했고 밥도 맛있었다.
하나원에서 태국에서 같이 있던 여성들과 생활하며 다시 고생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대학 다니다가 온 것이 왜 그리 싫어할 일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감방은 아니었기에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다.
하나원을 졸업하기 전 임대주택 배정이 시작됐다. 그의 기수는 200명이 넘었는데 서울 임대주택은 16개만 나왔다. 절반 이상이 서울에 가고 싶어 하니 추첨은 피할 수 없었다.
강 씨는 새벽기도 때마다 서울에 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그 16명 중에 뽑혔다. ‘서울’을 뽑은 순간 ‘얘들이 나를 더 미워하겠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울을 뽑은 16명이 어느 구에 갈지를 놓고 추첨했다. 성동구 금호동 임대주택이 하나 있었는데, 다들 성동구란 이름이 생소해서였는지 선택하지 않았다. 강 씨는 자연스럽게 그 임대주택으로 가게 됐다. 막상 가 보니 노원구나 강서구보다 입지가 좋은 곳이었다. 엎어져도 떡 함지에 엎어진 격이었다.
2016년 한양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강지현 대표.
● 날개를 만드는 시간
2010년 4월 8일, 12평 임대주택에서 강 씨의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첫 목표는 다른 젊은 탈북민들과 다름없었다. 지금이 대학에 갈 적기라고 다들 생각했다.
학원에 다니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한국까지 왔는데 패션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탈북민이라고 좋은 대학에 그냥 입학시켜 줄 리 없었다. 특히 영어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2년제 한국폴리텍대학 패션디자인학과로 목표를 정했다. 실기 위주로 학생을 받아서 손재주 좋은 강 씨에겐 유리했다.
그렇게 들어간 폴리텍대 공부는 쉽지 않았다. 1시간 넘게 걸려 대학에 도착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대학 4년 과정을 2년에 몰아 들어야 했기에 코피 나도록 공부해야 했다.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듯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를 잘 이겨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겁니다. 독하게 공부해서 학점도 좋게 받았어요. 그렇게 단련하고 나니 다른 것들은 쉬워 보이더군요.”
폴리텍대를 졸업하고 이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학하려고 하니 이번에도 영어가 문제였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3개월 동안 필리핀 어학 연수도 다녀왔다. 이런 준비 끝에 2014년 한양대 의류학과에 편입했다.
한양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말투도 서울말씨여서 과 동기들은 그가 북에서 온 줄 몰랐다. 누가 물어보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다. 한양대에서의 2년은 폴리텍대보다 수월했다.
2016년 8월 한양대를 졸업했다. 패션에 빠져 있던 개마고원 소녀는 이제 서울에서 새롭게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아직은 홀로 날 순 없었다.
그의 첫 직장은 모델 양성학원 겸 패션쇼 기획사인 ‘더모델즈’였다. 대표 정소미 감독은 서울 컬렉션을 비롯해 패션쇼를 수백 회 연출한 국내 대표적인 패션쇼 전문 기획 및 연출자 출신이었다. 정 감독 밑에서 강 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참가하는 서울패션위크 ‘서울컬렉션’ 실무를 두 번 맡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0년 서울패션위크는 20주년이어서 120개 브랜드가 참여해 55차례 패션쇼를 선보였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가 펼치는 ‘서울컬렉션’,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런던 패션위크와 협력해 열리는 ‘해외 교류 패션쇼’, 14개 대학이 참여하는 ‘대학생 우수 작품 패션쇼’ 등 다양한 쇼가 열렸다. 국내외 바이어가 500명 이상 참여해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도 진행했다. 일이 힘든 만큼 많이 배웠다. 그만큼 성장한 시간이었다.
2020년 강지현 대표가 자신이 디자인한 아이스토리 티셔츠를 입고 모델로 섰다. 오른팔 소매에 새겨진 문양은 백두산 개마고원을 상징하는 그만의 ‘아이브랜드’다.
● 스타트업 대표가 되다
일을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은 욕구는 커져만 갔다. 시간 나는 대로 틈새시장을 연구했다. 2017년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했다.
오랜 준비를 거쳐 2020년 5월 더모델즈를 퇴사하고 곧바로 스타트업 ‘새샘’을 만들고 패션 브랜드 ‘아이스토리’를 내놨다.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탈북민들 스토리를 바탕으로 티셔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아산나눔재단 글로벌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당선돼 받은 300만 원이 종잣돈이 됐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국내보다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같은 해외에서 구매 주문이 몰렸다. 많이 팔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익률은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국제 택배비가 계속 오른 탓이었다.
아이스토리 하나에만 의지해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했다. 원단 중개 플랫폼 ‘아이페브릭’을 개발했다.
회사를 운영해 보니 패션만 배웠지 사업에 대해선 잘 모르는다는 한계를 느끼게 됐다. 지난해 고려대 첨단기술비지니스학과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창업학 석사에 도전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정부 예비창업 패키지에 뽑혔고, 올 5월에는 50 대 1 경쟁률을 뚫고 ‘도약 패키지’에 당선돼 지원금을 받았다. 스타트업 ‘정석 코스’를 밟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 분야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업계획서를 잘 써서 타당성을 설득하고, 발표도 잘해야 한다. 신용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강 씨는 이 분야 전문가로 성장했다. 최근 5년 동안 서울시 창업경진대회, 서울시 테스트베드 데모데이, 아산나눔재단 등 여러 사업 발표 대회에서 다섯 차례 상을 받았다.
예비 창업자 멘토로도 활약하고 있다. 2022년부터 컨설팅해 준 스타트업이 6개가 넘는다. 지난해 한국벤처기업회 멘토로 임명됐고 범부처 IRIS 평가위원, 통일부 심사역 직함도 얻었다.
“한국 청년들에게 브랜딩은 어떻게 하고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지, 특허는 어떻게 등록하며 사업계획서와 발표 자료는 어떻게 만드는지 컨설팅해 주고 심사도 합니다. 문뜩문뜩 개마고원 탈북민 강지현이 정말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싶어 뿌듯합니다.”
2014년 한양대 재학 시절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옷을 디자인하는 강지현 대표.
●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강 씨는 서울 강남구 ARTE22 갤러리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들로 ‘다결 랩소디’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2021년부터 전시회만 여러 차례 열었다.
“패션과 그림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똑같이 영감에서 출발하거든요. 탈북민 스토리를 패션 브랜드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2021년에 정식 데뷔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색채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 돋보인다. 밝고 강렬하며, 때로는 눈부시게 충돌한다. 강 씨는 ‘색의 언어’를 통해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흘러간 기억을 붙잡기보다,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을 천천히 겹쳐 쌓는다. 그에게 색은 마음의 깊이를 말하는 도구이며, 주름은 말하지 못한 시간을 드러낸다.
스타트업 대표에 화가 생활까지 하지만,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
“얼마 전 SK텔레콤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선정됐어요. 선정된 15개 기업 대표들이 엠티를 하는데 저만 여자인 거예요. 다들 저보고 ‘대표님이세요’라고 묻더군요.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젊게 봐 주시는 걸 보면 저에게는 미래가 많이 남은 거겠죠?”
삶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다. 힘들 때마다 그는 내면의 강지현을 격려한다.
“지금까지 잘 헤쳐 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힘내. 이렇게 스스로 속삭이죠. 지난 1년 동안 배운 것이 한국 와서 10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과거의 10년이 없었다면, 오늘의 1년도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축적하며 크는 것이고, 저는 지금도 축적하는 중입니다.”
그의 꿈은 스타트업을 성공시킨 뒤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는 창업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통일 되면 북한 개발을 위한 스타트업 센터도 세우고 싶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싶어 고향을 떠났던 강지현에겐 평양에서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창업을 가르치는 날이 올 것 같다. 그는 아직 젊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기자 admin@gamemong.inf
개마고원에서 중학생 소녀는 매직 머리에 후드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모두 북한 당국이 단속하는 차림새였다.
마을 사람들은 “쟤는 ‘황색 바람’에 젖어 버린 이상한 애야. 저런 날라리와 같이 놀지 마”라며 자식들을 단속했다. 학교에서 아무리 비판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 간부였던 부친은 딸 교육을 잘 못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수시로 써야 했다.
3년에 한 벌씩 주는 교복은 받을 야마토무료게임 때는 훌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다. 소녀는 집에서 혼자 교복을 줄였다 늘였다 했다. 친구들과 몰래 한국이나 외국 드라마를 볼 때면 늘 패션에 눈이 갔다. “우리도 저렇게 입고 살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로부터 20년 뒤, 그 소녀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 만든 옷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어쩌면 패션을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 바다이야기부활 른다.
하지만 이 꿈을 완성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난 운명을 거스르고 탈북해 서울에 정착해서 빈주먹으로 일어서야 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열심히 가다 보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것을….
릴게임사이트
한국 생활 초기인 2010년, 해외 의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회장의 그리스 의상 설명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강지현 대표.
● 개마고원의 청바지녀
강지현은 199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가 릴게임예시 4세 때 평양에서 상하수도 관련 기관 간부였던 할아버지가 뭔 잘못을 했는지 하루아침에 가족과 함께 함북 청진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시골이 아닌 큰 도시로 간 것으로 보아 정치 범죄는 아닌 듯싶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잘못을 속죄한다는 의미로 백두산 건설 돌격대에 자원해 3년 동안 일했다. 당국의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후엔 양강도 백암군 임 릴게임야마토 업사업소 당 간부로 임명됐다. 개마고원의 울창한 산림과 깨끗한 강이 소녀의 놀이터였다.
그가 패션에 눈을 뜬 것은 11세 때 할아버지와 고모들이 사는 청진으로 가면서부터였다. 딸이 산골에서 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친은 그를 청진으로 유학 보냈다.
큰 무역회사 부기원(경리)으로 일하는 고모들은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고모들은 당시 청진에 대량으로 들어오는 일본 중고 옷을 넘겨받아 장마당에 팔았다. 강 씨의 고종사촌 언니들은 중고 옷 중에 마음에 드는 옷들을 골라 입었다. 물론 북한 당국이 통제하는 패션들이었다.
사촌 언니들이 크면 그 옷들은 자연스럽게 강 씨에게 전달됐다. 어느 순간 강 씨도 언니들처럼 옷을 골라 입기 시작했다. 몰래 보는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옷들을 눈여겨봤다가 비슷한 것이 나오면 골라냈다.
북한 당국의 옷차림 통제는 시기별로 들쑥날쑥했다. 죽일 것처럼 통제하다가, 아예 손을 놓고 있기도 했다. 강 씨가 청진에 살던 때는 통제가 약해진 때였다. 학교에 입고 가서는 안 됐지만, 10대 초반 소녀가 방과후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 후 부친이 와서 딸을 데리고 개마고원으로 돌아갔다. 촌 동네에선 아무리 조신하게 입는다고 입어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마을 사람들은 단체복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강 씨의 끼는 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까’ 고민하면서 머리를 고데기로 펴거나 염색하기도 했다. 외부 세계를 모르는 개마고원 주민들과, 많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외부 문물을 접한 강 씨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멋 내기 좋아하고 잘 노는 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슨 짓을 하건 이상하다고 했다. 모두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하게 사는 그를 부러워하는 학생도 주변에 적지 않았다.
푸른 숲과 강은 개마고원에서 자란 강지현 대표 가슴을 언제나 설레게 한다.
● “석 달만 중국에 살고 싶어”
2007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친은 딸을 청진에 있는 3년제 경제전문대학 부기학과에 다니게 했다. 경리 일을 하며 잘사는 고모들처럼 살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산으로 계산하는 일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 학기만 다니고 개마고원으로 돌아왔다.
그때쯤 북한 정책에 변화가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북한 과학기술 수준을 높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후계자 김정은에게 젊은 인재를 많이 남겨 주고 싶어서였는지, 북한에서 학비를 부담할 수 있는 고위 계층 자녀의 해외 유학을 허용한 것이다.
부친은 이 기회를 활용해 강 씨를 중국에 유학 보내기로 작정했다. 부친은 평양을 오가며 열심히 선을 찾아 로비했고 뇌물도 적잖게 썼다. 강 씨는 해외 유학생 선발 시험을 6번이나 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두 떨어졌다. 뇌물 먹은 간부는 강 씨가 불합격하면 뇌물을 다시 돌려줬다.
유학 준비를 하면서 지역 출판물 보급소에 취직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신문이나 책을 작은 도서관들에 나눠주는 일이었다. 중앙에선 북한 영화나 드라마, 음악을 넣은 CD도 내려왔는데,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CD 배포를 담당한 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북한에서 보급하는 CD는 한국이나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 눈이 높아진 강 씨 성에 차지 않았다. 몸은 북한에 있었지만 어느새 머리는 바깥세상에 살고 있었다. 바야흐로 18세. 한창 꿈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
어느 날 강 씨는 잘 알고 지내는 3세 위 동네 오빠에게 속을 터놓았다. 그 오빠는 중국에 잘사는 친척들이 있었고, 합법적인 여행증을 받아 중국을 여러 번 다녀왔다.
“오빠, 우리 부모님 모르게 날 좀 중국에 데려다 주면 안 돼? 딱 석 달만 구경하고 싶어.”
“정말 가 보고 싶어? 정 원하면 내가 구경시켜 줄게.”
그렇게 둘은 중국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오빠 친구까지 합세했다.
압록강이 강이 꽁꽁 얼어붙은 2008년 12월, 21세 두 청년과 강 씨는 길을 나섰다. 집에는 청진 고모네 집에서 석 달 정도 놀고 오겠다고 말해 승낙을 받았다.
그 오빠는 중국을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다. 셋은 차를 얻어 타고 삼지연으로 갔다. 경비대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오빠가 전화를 하니 연변에 사는 오빠 이모가 차를 끌고 마중 나왔다. 남들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탈북이었다.
지난달 말 서울 강남구 자신의 그림 전시회 ‘다결랩소디’에서 꽃다발을 안고 있는 강지현 대표.
● 중국 대학에 입학하다
오빠 이모라는 사람은 중국에서 교사였는데, 집에 가 보니 매우 잘 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과 한국 교회에서 돈을 지원받아 북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지낸 한 달은 꿈만 같았다.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선 한국 드라마를 원 없이 봤다.
백화점에는 드라마에서 본 옷들이 다 있었다. 중국 아가씨들은 한겨울에도 코트 안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어떤 옷을 입든 통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화점에 가 보고 강 씨는 시쳇말로 눈이 돌아갔다. 처음엔 한두 달 놀다가 개마고원 집에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런 강 씨의 심경 변화를 눈여겨보던 오빠 이모가 한 달쯤 뒤 제안했다.
“북에 다시 돌아갈래, 아니면 중국에서 대학 다닐래?”
가뜩이나 집에 돌아가기 싫었는데,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졌던 대학 생활을 중국에서 하게 해 준다니 꿈만 같았다.
2009년 1월 강 씨는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국적이 없는’ 그가 중국 대학에 정식 입학할 순 없었다. 대신 50대 초반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3년제 대학 ‘할빈아청대’에 들어갔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선교 목적으로 설립한 어학원 성격의 학교 아닌가 싶다. 한국 기독교계에 발이 넓은 그 이모 덕분에 탈북민 신분으로 학교 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학교는 하얼빈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변두리 도시에 있었다.
강 씨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가 입학한 중국어학과 같은 반에는 한국에서 온 청년도 넷이나 있었다. 3명은 강 씨보다 나이가 많았고 부산에서 왔다는 한 명은 어렸다. 강 씨는 한국에 온 뒤 “나, 부산 사나이야”를 입에 달고 살던 2세 어린 그 청년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한국 오빠들’은 강 씨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데, 대학에 다닐 거면 한국에서 다녀야지.”
4개월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고 방학을 맞았다. 3개월만 하겠다던 중국 살이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집에선 딸이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돌아가면 감옥행이었다. 이렇게 된 것,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 이모에게 전화해 “한국으로 보내 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이모는 이번에도 대책이 있었다. 하얼빈 어느 교회에서 경기 부천에서 온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보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이 선교사는 사람을 더 모아서 8월에 한국으로 한 팀을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7명이 모였다.
강지현 대표는 평범한 삶을 즐기는 시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나를 왜 미워하지?”
한국에 도착하는 과정도 순탄했다. 그해 8월 말 출발해 중국 남부 지방을 거쳐 라오스로 갔고, 거기서 태국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버스, 승용차, 배를 번갈아 타며 방콕에 도착한 뒤 이민국 감옥에 들어갔다.
당시는 한 해에 탈북민이 3000명 가까웠다. 감옥에 들어간 강 씨는 탈북민이 그렇게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감방에 여성 120명이 수감돼 있었다.
19세의 여리여리한 그를 보고 먼저 온 ‘기가 세 보이는’ 언니들이 “넌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대학에 다니다가 왔다고 하니 모두 표정이 바뀌었다.
“우리가 어떤 개고생을 당하며 여기에 왔는데, 이렇게 편하게 오는 애도 있네.”
텃세인지 질투인지 모를 구박과 따돌림이 시작됐다. 그의 자리는 화장실 옆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드나들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기름진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점점 야위어 갔고 기도 팍 죽었다. 살면서 처음 해 보는 고생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니 드디어 출발 순번이 돌아왔다. 공항에 갔는데 이번엔 어려 보이는 한국인 인솔자가 탈북민들에게 반말로 고래고래 폭언을 퍼부었다.
“야, 너네 한국에 가지 않을 거야? 조용히 해.”
그 사람을 떠올리면 강 씨는 지금도 치가 떨린다.
“왜 그 자식은 우릴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걸까요. 우리가 죄인도 아닌데 말이죠.”
‘내가 지금 제대로 된 나라에 가는 건지’ 싶어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어떻게 비행기에 탔고, 어떻게 공항에 내렸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2009년 11월 2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추운 날이었다. 그와 탈북민들은 버스에 타고 어디론가 가서 건강검진부터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조사기관에 들어갔다.
안 좋았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조사받으며 점차 바뀌었다. 시설도 좋고 방도 따뜻했고 밥도 맛있었다.
하나원에서 태국에서 같이 있던 여성들과 생활하며 다시 고생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대학 다니다가 온 것이 왜 그리 싫어할 일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감방은 아니었기에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다.
하나원을 졸업하기 전 임대주택 배정이 시작됐다. 그의 기수는 200명이 넘었는데 서울 임대주택은 16개만 나왔다. 절반 이상이 서울에 가고 싶어 하니 추첨은 피할 수 없었다.
강 씨는 새벽기도 때마다 서울에 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그 16명 중에 뽑혔다. ‘서울’을 뽑은 순간 ‘얘들이 나를 더 미워하겠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울을 뽑은 16명이 어느 구에 갈지를 놓고 추첨했다. 성동구 금호동 임대주택이 하나 있었는데, 다들 성동구란 이름이 생소해서였는지 선택하지 않았다. 강 씨는 자연스럽게 그 임대주택으로 가게 됐다. 막상 가 보니 노원구나 강서구보다 입지가 좋은 곳이었다. 엎어져도 떡 함지에 엎어진 격이었다.
2016년 한양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강지현 대표.
● 날개를 만드는 시간
2010년 4월 8일, 12평 임대주택에서 강 씨의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첫 목표는 다른 젊은 탈북민들과 다름없었다. 지금이 대학에 갈 적기라고 다들 생각했다.
학원에 다니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한국까지 왔는데 패션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탈북민이라고 좋은 대학에 그냥 입학시켜 줄 리 없었다. 특히 영어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2년제 한국폴리텍대학 패션디자인학과로 목표를 정했다. 실기 위주로 학생을 받아서 손재주 좋은 강 씨에겐 유리했다.
그렇게 들어간 폴리텍대 공부는 쉽지 않았다. 1시간 넘게 걸려 대학에 도착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대학 4년 과정을 2년에 몰아 들어야 했기에 코피 나도록 공부해야 했다.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듯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를 잘 이겨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겁니다. 독하게 공부해서 학점도 좋게 받았어요. 그렇게 단련하고 나니 다른 것들은 쉬워 보이더군요.”
폴리텍대를 졸업하고 이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학하려고 하니 이번에도 영어가 문제였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3개월 동안 필리핀 어학 연수도 다녀왔다. 이런 준비 끝에 2014년 한양대 의류학과에 편입했다.
한양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말투도 서울말씨여서 과 동기들은 그가 북에서 온 줄 몰랐다. 누가 물어보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다. 한양대에서의 2년은 폴리텍대보다 수월했다.
2016년 8월 한양대를 졸업했다. 패션에 빠져 있던 개마고원 소녀는 이제 서울에서 새롭게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아직은 홀로 날 순 없었다.
그의 첫 직장은 모델 양성학원 겸 패션쇼 기획사인 ‘더모델즈’였다. 대표 정소미 감독은 서울 컬렉션을 비롯해 패션쇼를 수백 회 연출한 국내 대표적인 패션쇼 전문 기획 및 연출자 출신이었다. 정 감독 밑에서 강 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참가하는 서울패션위크 ‘서울컬렉션’ 실무를 두 번 맡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0년 서울패션위크는 20주년이어서 120개 브랜드가 참여해 55차례 패션쇼를 선보였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가 펼치는 ‘서울컬렉션’,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런던 패션위크와 협력해 열리는 ‘해외 교류 패션쇼’, 14개 대학이 참여하는 ‘대학생 우수 작품 패션쇼’ 등 다양한 쇼가 열렸다. 국내외 바이어가 500명 이상 참여해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도 진행했다. 일이 힘든 만큼 많이 배웠다. 그만큼 성장한 시간이었다.
2020년 강지현 대표가 자신이 디자인한 아이스토리 티셔츠를 입고 모델로 섰다. 오른팔 소매에 새겨진 문양은 백두산 개마고원을 상징하는 그만의 ‘아이브랜드’다.
● 스타트업 대표가 되다
일을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은 욕구는 커져만 갔다. 시간 나는 대로 틈새시장을 연구했다. 2017년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했다.
오랜 준비를 거쳐 2020년 5월 더모델즈를 퇴사하고 곧바로 스타트업 ‘새샘’을 만들고 패션 브랜드 ‘아이스토리’를 내놨다.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탈북민들 스토리를 바탕으로 티셔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아산나눔재단 글로벌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당선돼 받은 300만 원이 종잣돈이 됐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국내보다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같은 해외에서 구매 주문이 몰렸다. 많이 팔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익률은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국제 택배비가 계속 오른 탓이었다.
아이스토리 하나에만 의지해선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했다. 원단 중개 플랫폼 ‘아이페브릭’을 개발했다.
회사를 운영해 보니 패션만 배웠지 사업에 대해선 잘 모르는다는 한계를 느끼게 됐다. 지난해 고려대 첨단기술비지니스학과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창업학 석사에 도전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정부 예비창업 패키지에 뽑혔고, 올 5월에는 50 대 1 경쟁률을 뚫고 ‘도약 패키지’에 당선돼 지원금을 받았다. 스타트업 ‘정석 코스’를 밟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 분야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업계획서를 잘 써서 타당성을 설득하고, 발표도 잘해야 한다. 신용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강 씨는 이 분야 전문가로 성장했다. 최근 5년 동안 서울시 창업경진대회, 서울시 테스트베드 데모데이, 아산나눔재단 등 여러 사업 발표 대회에서 다섯 차례 상을 받았다.
예비 창업자 멘토로도 활약하고 있다. 2022년부터 컨설팅해 준 스타트업이 6개가 넘는다. 지난해 한국벤처기업회 멘토로 임명됐고 범부처 IRIS 평가위원, 통일부 심사역 직함도 얻었다.
“한국 청년들에게 브랜딩은 어떻게 하고 자금은 어떻게 조달할지, 특허는 어떻게 등록하며 사업계획서와 발표 자료는 어떻게 만드는지 컨설팅해 주고 심사도 합니다. 문뜩문뜩 개마고원 탈북민 강지현이 정말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고 있구나 싶어 뿌듯합니다.”
2014년 한양대 재학 시절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옷을 디자인하는 강지현 대표.
●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강 씨는 서울 강남구 ARTE22 갤러리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들로 ‘다결 랩소디’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2021년부터 전시회만 여러 차례 열었다.
“패션과 그림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똑같이 영감에서 출발하거든요. 탈북민 스토리를 패션 브랜드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2021년에 정식 데뷔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색채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 돋보인다. 밝고 강렬하며, 때로는 눈부시게 충돌한다. 강 씨는 ‘색의 언어’를 통해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흘러간 기억을 붙잡기보다,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을 천천히 겹쳐 쌓는다. 그에게 색은 마음의 깊이를 말하는 도구이며, 주름은 말하지 못한 시간을 드러낸다.
스타트업 대표에 화가 생활까지 하지만,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
“얼마 전 SK텔레콤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선정됐어요. 선정된 15개 기업 대표들이 엠티를 하는데 저만 여자인 거예요. 다들 저보고 ‘대표님이세요’라고 묻더군요.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젊게 봐 주시는 걸 보면 저에게는 미래가 많이 남은 거겠죠?”
삶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다. 힘들 때마다 그는 내면의 강지현을 격려한다.
“지금까지 잘 헤쳐 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힘내. 이렇게 스스로 속삭이죠. 지난 1년 동안 배운 것이 한국 와서 10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과거의 10년이 없었다면, 오늘의 1년도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축적하며 크는 것이고, 저는 지금도 축적하는 중입니다.”
그의 꿈은 스타트업을 성공시킨 뒤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는 창업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통일 되면 북한 개발을 위한 스타트업 센터도 세우고 싶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싶어 고향을 떠났던 강지현에겐 평양에서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창업을 가르치는 날이 올 것 같다. 그는 아직 젊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기자 admin@gamemong.i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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