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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합니다. 때문에 만나게 몰랐다.[김성환]
* [민청련두꺼비열전] ② '남영동도 별거 아니네'... 대공분실 수사관을 가르친 남자(https://omn.kr/2fwx9)에서 이어집니다.
▲ 민청련 활동 당시의 최민화(중앙). 맨왼쪽 원혜영, 맨 오른쪽 박우섭.
ⓒ ⓒ민청 게임릴사이트 련동지회
1983년, 최민화는 김근태에게 삼고초려해 민청련 의장 수락을 받아냄으로써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민청련뿐 아니라 자신이 관여한 모든 조직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자신이 모든 짐을 지고 일을 처리했다.
신천지릴게임
이영희, 강만길 탄압을 공세로 맞받아 치다
민청련 창립 후, 최민화는 상임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동시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약칭 기사연) 연구출판부장직으로 일하며 월급 받는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 만족하며 지낼 사람이 아니었다.
민청련 창립 직후,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이른바 '기사연 통일문제 사건'이 터졌다. 당시 기사연은 조사연구사업의 하나로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3년 10월 말, 이 사업에 참여한 교사들이 비밀리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서 연구를 지도한 이영희 교수와 강만길 교수, 그리고 기사연 모바일릴게임 원장 조승혁 목사까지 연행돼 조사를 받는 사태로 확대됐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이 사건을 '용공 간첩 사건'으로 조작해, 정권에 눈엣가시였던 이영희·강만길 같은 반정부 지식인들을 매장시키려 했다.
최민화는 곧바로 사건 해결에 나섰다. 기사연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와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끌어들 야마토게임연타 였고, 세 기관이 함께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사건을 단순히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일 논의 전반에 대한 공세로 전환하기로 했다. 대책위원회 명의로 "민족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며 특정 기관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그는 조직을 확대해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전국사제단, KNCC가 공동 성명을 내도록 주도했다. 성명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통일 문제 논의가 보다 민주화되는 계기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결국 치안본부는 국내외 여론에 밀려 이영희·강만길·조승혁 3인에 대해 공소보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3인이 위법을 인정하고 개전의 정을 나타냄에 따라 석방한다"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 사람이 쓴 반성문과 인터뷰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공소보류란 주로 남파 간첩에게 적용하던 조치였다. 간첩이 남파되자마자 검거된 경우, 수사 과정에서 북한의 기밀이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다른 간첩 검거에 협조하는 등 당국에 유리한 활동을 할 때 적용하는 조치다.
한편 남영동 대공분실 측에서는 대책위를 이끌던 최민화가 남영동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들이받았다.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실이 이처럼 왜곡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공정한 재판 과정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했다. (중략) 이 세 분은 45일 동안 정신적 고문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석방을 조건으로 하여 강제 진술 내용을 반복 연습시켜서 이를 마치 자연스러운 석방 인터뷰인양 여론을 조작했다. (중략) 우리는 세 분의 정신적 상처가 하루속히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당국에 대해서는 그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 줄 것과 인권침해의 성격을 지닌 공소보류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 민청련 동지들과 회의 후 뒷풀이 모습.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조성우(작고), 이래경, 이범영(작고), 최민화, 원혜영, 김희택, 박우섭.
ⓒ 민청련동지회
김영삼의 출마 제의를 거절하다
어떤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꺼이 나서서 해결하던 최민화의 자세는 민청련 활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인 2·12총선을 앞두고, 민청련 내부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다. 민청련은 1983년 창립 이후, 1984년 과감한 공개 투쟁으로 침체된 운동세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여파는 제도권 정치로도 번져,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기존 민주한국당을 비판하며 새로운 선명 야당인 신민당을 창당했다. 2·12 총선의 초미의 관심사는 민한당과 신민당 중 어느 쪽이 제1야당을 차지하느냐였다.
이 정세 속에서 민청련은 김영삼·김대중 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한편에서는 선거 국면은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이므로, 야당과 협력해 반전두환 정권 투쟁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삼·김대중은 '운동가'라기보다 자신들의 집권만이 최종 목표인 정치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과 결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총선 거부 투쟁을 주장했다.
민청련은 논쟁은 격렬해도 늘 타협하고 절충해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조직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결론은 야당 세력과 결합하지는 않되, 선거 유세장에 참여해 대중의 반독재 의식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즈음 김영삼 캠프에서 최민화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영삼은 그와 독대한 자리에서 '신민당에 청년 세력이 후보자로 참여해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주자'고 말했다. 그 후보자로 지목된 이는 다름 아닌 최민화였다.
그러나 그는 조직의 결정을 그대로 전했다. 민청련은 논쟁의 초점을 총선 참여냐, 거부냐에 두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군사 독재 정권을 종식시킬 것이냐에 두고 있었다. 최민화는 청년 세력이 후보자로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앞으로 반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을 더욱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강화하려면 운동을 지도하고 이끌 역량을 충분히 축적하고 강화해야 한다며 참여 제안을 거절했다.
신민당 측은 최민화가 거절하자 고려대 출신 설훈을 접촉했다. 설훈은 고심 끝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지만, 민청련 내부에서 설훈의 출마를 반대했다. 그는 민청련 창립 당시 고려대를 대표해 참여했고, 당시 최민화가 이끌던 운영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민청련의 간부가 정당에 가입해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일부는 설훈이 출마할 경우 민청련에서 제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명할 경우 조직에도 상처가 컸다. 그때 최민화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설훈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훈아, 네 주장에 일리가 있고, 나 역시 앞으로는 그런 방향으로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감당해 나가야 할 일이 많고 앞으로도 더 긴 세월을 끈질기게 싸워 나가야 할 텐데. (중략)
지금 우리가 의견을 달리해 민청련 조직이 분열된다면 누가 어떻게 이런 역사적 소임을 대신할 수 있겠냐? 지금 민청련이 감당하고 있는 소중한 역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출마를 포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운영위원회 분위기로 봐서는 징계가 불가피할 것 같은데, 차라리 스스로 사의를 밝히는 게 어떻겠냐?"
결국 설훈은 최민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마를 포기하고 사표를 냈다. 이후 그는 자신 대신 성북구에 출마한 민청학련 출신 이철의 사무장이 되어 그의 당선을 도왔다.
▲ 1985년 2.12총선 당시 민청련이 제작한 선전 팸플릿
ⓒ 민청련동지회
단 하나의 예외, 아내 박혜숙
최민화는 어렵고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해결사'였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기도 했다. 외모도 둥글둥글하고 모난 데가 없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최민화·박혜숙 부부가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 세민약국을 열었을 때, 동네 사람으로 알게 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지켜봐 온 유영옥씨는 그를 '특이한 원칙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차를 몰다 실수로 벽에 긁었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더 상처가 나지 않도록 후진하지만, 최민화는 오히려 더 긁히면서도 전진했다고 한다. '인생에 후진은 없다'는 듯이.
그의 후배였던 나 역시 오랜 세월 함께하며 그가 얼마나 철저히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지 알았다. 그는 술자리에서도 언제나 청하 한 병만 마셨고, 그 원칙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말을 어눌하게 하고 두서가 긴 습관이 있었던 최민화는 유세 연설에 서툴렀다. 나중에 경기도 수원과 오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요점을 짧고 강하게 전달해야 하는 유세에는 약했다. 주위에서 아무리 고쳐 달라고 해도 그는 끝까지 자기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모두 낙선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원칙을 고수하던 최민화가 단 한 번 원칙을 내려놓은 일은 아내 박혜숙과의 결혼이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박정희 정권과의 지난한 싸움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이 그 길에 짐이 될 것이라 여겨, 한때 신부나 승려가 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박혜숙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됐고, 이후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선후배 사이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했다. 연이은 구속과 투옥 중에도 박혜숙은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그 헌신적인 사랑 앞에 최민화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런 박혜숙에게 암 선고가 내려졌을 때, 최민화는 헌신적인 간병으로 보답했다. 아내의 투병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말은 잘 못했지만 글은 잘 썼던 그는 아내와 함께한 투병 기록을 <사랑과 희망으로>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당시 KBS 아침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 민청련 회원들과의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는 최민화. 그의 유일한 애칭곡은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였다.
ⓒ 민청련동지회
에디트 피아프의 '사라의 찬가'를 부르고 떠나다
최민화가 즐겨 부르는 애창곡은 딱 한 곡,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였다. 민청련은 해마다 9월 30일 창립기념일 무렵이면 회원들이 모여 조촐한 기념식을 갖는다. 2022년 기념식은 회원 이기연이 운영하는 삼청동 무봉헌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서 한 후배가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한글 가사로 불렀다. 그러나 최민화는 후배가 번역된 가사로 부른 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랑스어 원곡으로 멋지게 불러 젖혔다.
그로부터 한 달하고 보름 뒤, 그는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가 평생 지켜온, 어쩌면 사소해 보이지만 철저했던 원칙들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 1만 5천 보 걷기를 목표로 삼고, 몸이 허락하지 않아도 매일 그 목표를 채웠다.
의사가 무리라며 수영장 물속 걷기를 권하자, 그는 물속에 들어가는 김에 자유형과 평영까지 섭렵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하루도 빠짐없이 밀어붙였다. 결국 몸이 감당할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려다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는 그곳에서 걸음 수 정해지지 않은 산책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혹 술이 당긴다면, 청하 두 병, 세 병쯤은 마음껏 들이켜도 좋을 것이다. 기자 admin@gamemong.i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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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청련 활동 당시의 최민화(중앙). 맨왼쪽 원혜영, 맨 오른쪽 박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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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최민화는 김근태에게 삼고초려해 민청련 의장 수락을 받아냄으로써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민청련뿐 아니라 자신이 관여한 모든 조직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자신이 모든 짐을 지고 일을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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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강만길 탄압을 공세로 맞받아 치다
민청련 창립 후, 최민화는 상임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동시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약칭 기사연) 연구출판부장직으로 일하며 월급 받는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 만족하며 지낼 사람이 아니었다.
민청련 창립 직후,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이른바 '기사연 통일문제 사건'이 터졌다. 당시 기사연은 조사연구사업의 하나로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3년 10월 말, 이 사업에 참여한 교사들이 비밀리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서 연구를 지도한 이영희 교수와 강만길 교수, 그리고 기사연 모바일릴게임 원장 조승혁 목사까지 연행돼 조사를 받는 사태로 확대됐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이 사건을 '용공 간첩 사건'으로 조작해, 정권에 눈엣가시였던 이영희·강만길 같은 반정부 지식인들을 매장시키려 했다.
최민화는 곧바로 사건 해결에 나섰다. 기사연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와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끌어들 야마토게임연타 였고, 세 기관이 함께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사건을 단순히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일 논의 전반에 대한 공세로 전환하기로 했다. 대책위원회 명의로 "민족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며 특정 기관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그는 조직을 확대해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전국사제단, KNCC가 공동 성명을 내도록 주도했다. 성명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통일 문제 논의가 보다 민주화되는 계기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결국 치안본부는 국내외 여론에 밀려 이영희·강만길·조승혁 3인에 대해 공소보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3인이 위법을 인정하고 개전의 정을 나타냄에 따라 석방한다"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 사람이 쓴 반성문과 인터뷰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공소보류란 주로 남파 간첩에게 적용하던 조치였다. 간첩이 남파되자마자 검거된 경우, 수사 과정에서 북한의 기밀이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다른 간첩 검거에 협조하는 등 당국에 유리한 활동을 할 때 적용하는 조치다.
한편 남영동 대공분실 측에서는 대책위를 이끌던 최민화가 남영동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들이받았다.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실이 이처럼 왜곡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공정한 재판 과정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했다. (중략) 이 세 분은 45일 동안 정신적 고문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석방을 조건으로 하여 강제 진술 내용을 반복 연습시켜서 이를 마치 자연스러운 석방 인터뷰인양 여론을 조작했다. (중략) 우리는 세 분의 정신적 상처가 하루속히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당국에 대해서는 그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 줄 것과 인권침해의 성격을 지닌 공소보류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 민청련 동지들과 회의 후 뒷풀이 모습.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조성우(작고), 이래경, 이범영(작고), 최민화, 원혜영, 김희택, 박우섭.
ⓒ 민청련동지회
김영삼의 출마 제의를 거절하다
어떤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꺼이 나서서 해결하던 최민화의 자세는 민청련 활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인 2·12총선을 앞두고, 민청련 내부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다. 민청련은 1983년 창립 이후, 1984년 과감한 공개 투쟁으로 침체된 운동세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여파는 제도권 정치로도 번져,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기존 민주한국당을 비판하며 새로운 선명 야당인 신민당을 창당했다. 2·12 총선의 초미의 관심사는 민한당과 신민당 중 어느 쪽이 제1야당을 차지하느냐였다.
이 정세 속에서 민청련은 김영삼·김대중 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한편에서는 선거 국면은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이므로, 야당과 협력해 반전두환 정권 투쟁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삼·김대중은 '운동가'라기보다 자신들의 집권만이 최종 목표인 정치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과 결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총선 거부 투쟁을 주장했다.
민청련은 논쟁은 격렬해도 늘 타협하고 절충해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조직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결론은 야당 세력과 결합하지는 않되, 선거 유세장에 참여해 대중의 반독재 의식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즈음 김영삼 캠프에서 최민화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영삼은 그와 독대한 자리에서 '신민당에 청년 세력이 후보자로 참여해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주자'고 말했다. 그 후보자로 지목된 이는 다름 아닌 최민화였다.
그러나 그는 조직의 결정을 그대로 전했다. 민청련은 논쟁의 초점을 총선 참여냐, 거부냐에 두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군사 독재 정권을 종식시킬 것이냐에 두고 있었다. 최민화는 청년 세력이 후보자로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앞으로 반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을 더욱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강화하려면 운동을 지도하고 이끌 역량을 충분히 축적하고 강화해야 한다며 참여 제안을 거절했다.
신민당 측은 최민화가 거절하자 고려대 출신 설훈을 접촉했다. 설훈은 고심 끝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지만, 민청련 내부에서 설훈의 출마를 반대했다. 그는 민청련 창립 당시 고려대를 대표해 참여했고, 당시 최민화가 이끌던 운영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민청련의 간부가 정당에 가입해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일부는 설훈이 출마할 경우 민청련에서 제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명할 경우 조직에도 상처가 컸다. 그때 최민화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설훈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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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의견을 달리해 민청련 조직이 분열된다면 누가 어떻게 이런 역사적 소임을 대신할 수 있겠냐? 지금 민청련이 감당하고 있는 소중한 역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출마를 포기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운영위원회 분위기로 봐서는 징계가 불가피할 것 같은데, 차라리 스스로 사의를 밝히는 게 어떻겠냐?"
결국 설훈은 최민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마를 포기하고 사표를 냈다. 이후 그는 자신 대신 성북구에 출마한 민청학련 출신 이철의 사무장이 되어 그의 당선을 도왔다.
▲ 1985년 2.12총선 당시 민청련이 제작한 선전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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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는 어렵고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해결사'였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기도 했다. 외모도 둥글둥글하고 모난 데가 없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최민화·박혜숙 부부가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 세민약국을 열었을 때, 동네 사람으로 알게 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지켜봐 온 유영옥씨는 그를 '특이한 원칙주의자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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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후배였던 나 역시 오랜 세월 함께하며 그가 얼마나 철저히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지 알았다. 그는 술자리에서도 언제나 청하 한 병만 마셨고, 그 원칙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말을 어눌하게 하고 두서가 긴 습관이 있었던 최민화는 유세 연설에 서툴렀다. 나중에 경기도 수원과 오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요점을 짧고 강하게 전달해야 하는 유세에는 약했다. 주위에서 아무리 고쳐 달라고 해도 그는 끝까지 자기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모두 낙선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원칙을 고수하던 최민화가 단 한 번 원칙을 내려놓은 일은 아내 박혜숙과의 결혼이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박정희 정권과의 지난한 싸움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이 그 길에 짐이 될 것이라 여겨, 한때 신부나 승려가 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박혜숙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됐고, 이후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선후배 사이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했다. 연이은 구속과 투옥 중에도 박혜숙은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그 헌신적인 사랑 앞에 최민화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런 박혜숙에게 암 선고가 내려졌을 때, 최민화는 헌신적인 간병으로 보답했다. 아내의 투병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말은 잘 못했지만 글은 잘 썼던 그는 아내와 함께한 투병 기록을 <사랑과 희망으로>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책의 내용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당시 KBS 아침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 민청련 회원들과의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는 최민화. 그의 유일한 애칭곡은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였다.
ⓒ 민청련동지회
에디트 피아프의 '사라의 찬가'를 부르고 떠나다
최민화가 즐겨 부르는 애창곡은 딱 한 곡,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였다. 민청련은 해마다 9월 30일 창립기념일 무렵이면 회원들이 모여 조촐한 기념식을 갖는다. 2022년 기념식은 회원 이기연이 운영하는 삼청동 무봉헌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서 한 후배가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한글 가사로 불렀다. 그러나 최민화는 후배가 번역된 가사로 부른 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랑스어 원곡으로 멋지게 불러 젖혔다.
그로부터 한 달하고 보름 뒤, 그는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가 평생 지켜온, 어쩌면 사소해 보이지만 철저했던 원칙들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 1만 5천 보 걷기를 목표로 삼고, 몸이 허락하지 않아도 매일 그 목표를 채웠다.
의사가 무리라며 수영장 물속 걷기를 권하자, 그는 물속에 들어가는 김에 자유형과 평영까지 섭렵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하루도 빠짐없이 밀어붙였다. 결국 몸이 감당할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려다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는 그곳에서 걸음 수 정해지지 않은 산책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혹 술이 당긴다면, 청하 두 병, 세 병쯤은 마음껏 들이켜도 좋을 것이다. 기자 admin@gamemong.i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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