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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나가려다 주름을 중 행여나 말에 똑같다.[※ 편집자 주= 이번 특집 기사는 [삶] 인터뷰이들의 인생 목표, 좌우명, 삶의 의미 등을 주로 다뤘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이며 세 번째 기사는 다음 주 중에 송고할 예정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 [연합뉴스 사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젊었던 시절 내 삶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냄비에 넣고는 끓여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의 경제적 파산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차장에서 일하는 등 바다이야기게임기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생이었던 딸이 유방암으로 숨지는 것을 계기로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됐습니다"
이는 태초먹거리학교 이계호 교장(충남대 명예교수)이 [삶]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2022년 카카오야마토 9월부터 진행된 [삶]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적지 않은 성취를 이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이타적 삶에 높은 가치를 뒀다. 자기의 현실적 삶이 어렵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2022 바다이야기고래출현 년 9월부터 진행한 [삶] 인터뷰의 기존 송고 내용 가운데 인터뷰이들의 인생 목표와 좌우명 등 삶의 가치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해 별도로 묶은 것이다.
충북 옥천에 있는 태초먹거리학교의 모습 [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 제공]
바다이야기오락실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충남대 명예교수)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차장에서 일할 때 내 삶의 목표는 돈이었다. 나중에 돈을 벌면 냄비에 돈을 가득 집어넣고 삶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맛이 어떠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나의 딸이 25세에 유방암으로 하늘나라로 가면서 내 삶의 목표는 바뀌었다. 바다신2 다운로드
딸은 22세에 발병했고 수술했지만 재발했다. 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의과대학의 공부를 독학했다. 전 세계 암 병원의 치료 방법을 다룬 논문을 파고들었다. 전 세계에서 병원이 포기한 암 환자가 민간요법으로 나았다고 하면 직접 그곳에 가서 그 방법을 배워 딸한테 시도했다. 불행히도 이는 물거품으로 끝났다.
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너무 많이 실수했고, 엉뚱한 짓을 많이 했다. 주변을 보니 다른 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도 우리 집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2010년 7월에 암 환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딸이 하늘나라로 간 지 1년 만이었다. 태초 먹거리 학교는 이렇게 세워졌다.
나는 딸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먹고 살고 성공하려 하는지 등을 생각하게 됐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망 상태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목표가 됐다.
태초먹거리학교에서 직접 음식을 만드는 이계호 교장 [본인 제공]
건강을 위해서는 특정한 음식을 찾기보다는 골고루 균형 있는 식사를 하는 게 좋다. 술은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나쁜 방법이다. 술을 마시면 1급 발암물질인 아세트알데하이드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고기의 붉은 색소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발암물질 2군에 속한다. 발암물질 2군이란 사람한테는 실험 중이지만 동물에서는 암을 일으킨다는 것이 확인됐다는 의미다.
삶에서 내일이 아닌 오늘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보람있게 살면 그것이 행복이다. 삶을 단순하게 바꾸는 것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다.
길을 가다 꽃 한송이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다른 층의 사람이 들어왔을 때 웃으면서 인사하는 습관이 단순하고 행복하게 사는 삶의 방식이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미영 1형 당뇨병 환우회 대표 [연합뉴스 사진]
김미영 1형 당뇨병 환우회 대표
나의 좌우명은 불평만 하지 말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우리 아들이 1형 당뇨를 처음 진단받았을 때 같은 병 환우의 부모들이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답답한 것은 한 번도 문제점을 정부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불만만 이야기하지 말고 실천할 것은 한번 해보자고 말한다.
원래 내 삶의 목표는 그냥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결혼하고도 평범한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이나 옷 등을 하나 구입하더라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중산층의 안정적 삶을 원했다. 나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서 프로그램 개발자였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4살 되던 해 1월에 당뇨 진단을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많이 먹었고, 화장실에 자주 갔다. 그러면서 몸에는 힘이 없다고 했다. 동네 소아청소년과와 한의원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녔는데, 의사들은 "아이가 크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김미영 대표 아들 정소명 군이 7살때 인슐린 펜으로 인슐린 주사하는 모습 [김미영 대표 제공]
대학병원에서 진단받기 직전에는 아이가 30분마다 소변을 봤다. 화장실까지 가는 짧은 시간도 참지 못하고 방바닥에 실수한 적도 있었다. 그날 걸레로 닦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그곳에서 끈적끈적한 것이 밟혔다.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아이를 대학병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1형당뇨 확진을 받은 후 나는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6개월 후에 아이는 스스로 혈당 체크를 했다. 1년 후인 5살 때에는 아이가 직접 인슐린주사를 시작했다. 혈당 체크는 하루에 10회 이상을 했다. 한 달이면 300회, 1년이면 4천회 가까이 됐다. 인슐린주사는 하루에 4번 이상이니 연간 1천500회 정도였다. 혈당 체크와 인슐린 주사를 합하면 연간 5천회 이상이었다.
온라인 기도회에서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5살 1형 당뇨 여자아이 [엄마 제공]
나는 1형 당뇨 완치사례를 얻기 위해 전 세계 논문과 기사를 미친 듯이 뒤졌다. 1건의 완치 사례라도 나오면 우리 아이에게 적용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외국에서 연속혈당측정기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럽에 있는 지인을 통해 이 기기를 구입해 사용해봤더니 혈당 관리에 아주 유용했다. 다른 환우들도 이 기기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 권했는데, 구입 절차가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서 내가 여러 나라의 판매처에 메일을 보냈는데, 체코에서만 답신이 왔다. 미국 혈당기를 판매하는 대리점이었다. 그 대리점은 개인별로 기기를 각각 발송할 수 없으니 단체로 주문하라고 했다. 내가 대신 주문하게 된 이유다.
그런데 나는 연속혈당측정기를 구입하려는 다른 환우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관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됐다. 관세청과 식약처, 검찰의 조사가 7차례나 진행됐다. 다행히 나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이 아주 심했다.
나는 정부가 1형 당뇨병을 중증 난치질환으로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1형 당뇨병은 완치가 어렵다. 치료를 중단하면 사망 또는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진단과 치료에 드는 사회경제적 부담이 상당히 크니 중증난치성 질환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현정화 감독 [연합뉴스 사진]
마사회 탁구 감독 현정화
내 좌우명은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왔다. 나 스스로 약간의 나태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2등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됐다. 1등이 아니면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게임이라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이 안 찌는 것도 이런 성격의 영향이 있다. 또 나는 탁구를 잘한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곤 하는데,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히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면서 트레이닝복을 사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곤란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갑자기 식당 조리사로 일하게 됐는데, 늘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 주무셔야 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늘 곧았고 부지런하셨다. 나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플 때도 있었지만 누워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선수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다.
1991년 남북탁구단일팀의 현정화 선수 제41회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한 현정화 선수가 강 스매시로 공격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탁구는 우연히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이 건물 2층에 있었는데, 탁구실 앞을 지나서 올라가야 했다. 탁구실을 몇 번 구경했는데, 선수들이 소리 지르고 (탁구공 소리가) 경쾌한 것이 좋았다.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와서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탁구를 시작하게 됐다.
탁구 선수로서 나의 하이라이트는 88 서울올림픽 때였다. 당시 나는 20세였다. 5천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체육관이 관중으로 꽉 찼다. 나는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가운데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일본 지바에서 열린 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으로 출전해 우승한 것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다. 북한 선수들과 같이 한 달간 연습해서 좋은 성과를 거뒀는데, 작은 통일을 이룬 듯했다.
나는 탁구를 생활 탁구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탁구는 좋은 운동이다. 특히 어르신들한테 좋다.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외로움을 덜 수 있다.
김민정 미혼모가족협회 대표와 아기 [본인 제공]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
내 삶의 원칙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살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도우려 한다. 그냥 지나치면 마음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혼모를 대변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 말을 들어주니 감사하다
나는 경남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먼저 아버지가 출가해 스님이 됐고, 이에 화가 난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갔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쌀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반찬은 김치, 간장, 고추장뿐이었다. 쌀밥 대신에 보리밥과 수제비, 칼국수를 먹는 날이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전과(참고서)나 문제지 등을 사본 적이 없다. 학원도 가본 적이 없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빨래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는 남의 집 모내기, 벼 베기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는 품삯을 조금 받았다. 겨울에는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할머니, 언니와 함께 합천 고향 집에서 여상 1학년 시절의 김민정 대표(맨 왼쪽) [본인 제공]
나는 야간 상고, 야간 전문대를 다니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아이를 가졌다. 남자친구는 낙태하라고 했지만, 뱃속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를 낳았더니 남친은 아이를 입양 보내라고 했다. 나는 남친과 헤어졌고 홀로 직접 키웠다.
미혼모 가정이라고 해서 다른 가정과 다를 게 없다. 아이에게 아빠를 만들어줄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미혼모는 아이 아빠가 도주한 상황에서 용기를 갖고 생명을 지켜낸 사람이다. 그러니 미혼모 가정에 대해 편견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연합뉴스 사진]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강철서신'의 저자)
나의 좌우명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이다. 늘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회를 바라보려 한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정직함을 중시한다.
내 삶의 목적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 주민, 아프리카 사람들을 비롯해 극단적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북한 인권운동을 한 것은 북한 실태가 너무 참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어마어마한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체제를 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2025 서울북한인권세계대회 2025년 10월 22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2025 서울북한인권세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북한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2012년 전이었다. 당시는 북한 내부의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활발하게 뛰었던 시절이다. 일부 사람들은 주사파가 최전성기였던 시절을 나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북한 인권운동 과정에서 후회되는 일이 많았다. 북한에서 워낙 인명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판단했다면 그 사람들이 잡히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북한 문제는 평소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도 북한 인권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엄청나게 아프고 인권이 좋지 않은 동포들이 있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 [연합뉴스 사진]
김용균 재단의 김미숙 이사장(김용균 어머니)
나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보고 느낀 것이 있고, 알게 된 것이 많은데 어떻게 모른 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 길이 쉽지는 않다.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야 하고, 그 사고를 되새김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런 운동을 할지 확답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내 아들 용균이는 2018년 12월11일 새벽 충남 태안의 서부발전 컨베이어벨트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들 나이 24세였다.
당일 오전 6시쯤 태안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러 오라고 했다. 우리는 아들이 크게 다쳤거나 의식을 잃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부랴부랴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태안의료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뛰어갔다.
그곳에 용균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안실에 가서 인상착의를 말했더니 청년 한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이 서랍장을 열었고, 석탄 분진으로 얼굴이 까만 청년의 얼굴이 나왔다. 청년의 눈썹을 보고 피부,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아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원청의 책임이다" 2023년 12월 4일 오전 서울 대법원 앞에서 고(故) 김용균 노동자 사망 사건 관련 대법원의 책임 있는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호소문을 읽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나는 용균의 손이나 몸을 만지려 했는데, 영안실 직원이 제지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목과 머리가 분리됐고, 부모가 그 모습을 보면 살아가기 힘드니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들은 우리 부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는데, 영안실 밖으로 쫓겨나면서 현실임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복도에서 뒹굴면서 통곡했다. 아들을 다시 보고 싶으니 보여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문을 잠가놓고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요즘의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청년들이 우리 세대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데, 기성세대들이 모두 망쳐 놓은 것 같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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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 [연합뉴스 사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젊었던 시절 내 삶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냄비에 넣고는 끓여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의 경제적 파산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차장에서 일하는 등 바다이야기게임기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생이었던 딸이 유방암으로 숨지는 것을 계기로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됐습니다"
이는 태초먹거리학교 이계호 교장(충남대 명예교수)이 [삶]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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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이타적 삶에 높은 가치를 뒀다. 자기의 현실적 삶이 어렵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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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에 있는 태초먹거리학교의 모습 [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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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딸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먹고 살고 성공하려 하는지 등을 생각하게 됐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망 상태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목표가 됐다.
태초먹거리학교에서 직접 음식을 만드는 이계호 교장 [본인 제공]
건강을 위해서는 특정한 음식을 찾기보다는 골고루 균형 있는 식사를 하는 게 좋다. 술은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나쁜 방법이다. 술을 마시면 1급 발암물질인 아세트알데하이드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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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내일이 아닌 오늘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보람있게 살면 그것이 행복이다. 삶을 단순하게 바꾸는 것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다.
길을 가다 꽃 한송이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다른 층의 사람이 들어왔을 때 웃으면서 인사하는 습관이 단순하고 행복하게 사는 삶의 방식이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미영 1형 당뇨병 환우회 대표 [연합뉴스 사진]
김미영 1형 당뇨병 환우회 대표
나의 좌우명은 불평만 하지 말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우리 아들이 1형 당뇨를 처음 진단받았을 때 같은 병 환우의 부모들이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답답한 것은 한 번도 문제점을 정부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불만만 이야기하지 말고 실천할 것은 한번 해보자고 말한다.
원래 내 삶의 목표는 그냥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결혼하고도 평범한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이나 옷 등을 하나 구입하더라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중산층의 안정적 삶을 원했다. 나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서 프로그램 개발자였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4살 되던 해 1월에 당뇨 진단을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많이 먹었고, 화장실에 자주 갔다. 그러면서 몸에는 힘이 없다고 했다. 동네 소아청소년과와 한의원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녔는데, 의사들은 "아이가 크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김미영 대표 아들 정소명 군이 7살때 인슐린 펜으로 인슐린 주사하는 모습 [김미영 대표 제공]
대학병원에서 진단받기 직전에는 아이가 30분마다 소변을 봤다. 화장실까지 가는 짧은 시간도 참지 못하고 방바닥에 실수한 적도 있었다. 그날 걸레로 닦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그곳에서 끈적끈적한 것이 밟혔다.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아이를 대학병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1형당뇨 확진을 받은 후 나는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6개월 후에 아이는 스스로 혈당 체크를 했다. 1년 후인 5살 때에는 아이가 직접 인슐린주사를 시작했다. 혈당 체크는 하루에 10회 이상을 했다. 한 달이면 300회, 1년이면 4천회 가까이 됐다. 인슐린주사는 하루에 4번 이상이니 연간 1천500회 정도였다. 혈당 체크와 인슐린 주사를 합하면 연간 5천회 이상이었다.
온라인 기도회에서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5살 1형 당뇨 여자아이 [엄마 제공]
나는 1형 당뇨 완치사례를 얻기 위해 전 세계 논문과 기사를 미친 듯이 뒤졌다. 1건의 완치 사례라도 나오면 우리 아이에게 적용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외국에서 연속혈당측정기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럽에 있는 지인을 통해 이 기기를 구입해 사용해봤더니 혈당 관리에 아주 유용했다. 다른 환우들도 이 기기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 권했는데, 구입 절차가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서 내가 여러 나라의 판매처에 메일을 보냈는데, 체코에서만 답신이 왔다. 미국 혈당기를 판매하는 대리점이었다. 그 대리점은 개인별로 기기를 각각 발송할 수 없으니 단체로 주문하라고 했다. 내가 대신 주문하게 된 이유다.
그런데 나는 연속혈당측정기를 구입하려는 다른 환우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관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됐다. 관세청과 식약처, 검찰의 조사가 7차례나 진행됐다. 다행히 나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이 아주 심했다.
나는 정부가 1형 당뇨병을 중증 난치질환으로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1형 당뇨병은 완치가 어렵다. 치료를 중단하면 사망 또는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진단과 치료에 드는 사회경제적 부담이 상당히 크니 중증난치성 질환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현정화 감독 [연합뉴스 사진]
마사회 탁구 감독 현정화
내 좌우명은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왔다. 나 스스로 약간의 나태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2등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됐다. 1등이 아니면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게임이라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이 안 찌는 것도 이런 성격의 영향이 있다. 또 나는 탁구를 잘한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곤 하는데,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히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면서 트레이닝복을 사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곤란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갑자기 식당 조리사로 일하게 됐는데, 늘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 주무셔야 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늘 곧았고 부지런하셨다. 나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플 때도 있었지만 누워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선수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다.
1991년 남북탁구단일팀의 현정화 선수 제41회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한 현정화 선수가 강 스매시로 공격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탁구는 우연히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이 건물 2층에 있었는데, 탁구실 앞을 지나서 올라가야 했다. 탁구실을 몇 번 구경했는데, 선수들이 소리 지르고 (탁구공 소리가) 경쾌한 것이 좋았다.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와서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탁구를 시작하게 됐다.
탁구 선수로서 나의 하이라이트는 88 서울올림픽 때였다. 당시 나는 20세였다. 5천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체육관이 관중으로 꽉 찼다. 나는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가운데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일본 지바에서 열린 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으로 출전해 우승한 것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다. 북한 선수들과 같이 한 달간 연습해서 좋은 성과를 거뒀는데, 작은 통일을 이룬 듯했다.
나는 탁구를 생활 탁구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탁구는 좋은 운동이다. 특히 어르신들한테 좋다.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외로움을 덜 수 있다.
김민정 미혼모가족협회 대표와 아기 [본인 제공]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
내 삶의 원칙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살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도우려 한다. 그냥 지나치면 마음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혼모를 대변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 말을 들어주니 감사하다
나는 경남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먼저 아버지가 출가해 스님이 됐고, 이에 화가 난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갔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쌀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반찬은 김치, 간장, 고추장뿐이었다. 쌀밥 대신에 보리밥과 수제비, 칼국수를 먹는 날이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전과(참고서)나 문제지 등을 사본 적이 없다. 학원도 가본 적이 없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빨래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는 남의 집 모내기, 벼 베기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는 품삯을 조금 받았다. 겨울에는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할머니, 언니와 함께 합천 고향 집에서 여상 1학년 시절의 김민정 대표(맨 왼쪽) [본인 제공]
나는 야간 상고, 야간 전문대를 다니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아이를 가졌다. 남자친구는 낙태하라고 했지만, 뱃속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를 낳았더니 남친은 아이를 입양 보내라고 했다. 나는 남친과 헤어졌고 홀로 직접 키웠다.
미혼모 가정이라고 해서 다른 가정과 다를 게 없다. 아이에게 아빠를 만들어줄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미혼모는 아이 아빠가 도주한 상황에서 용기를 갖고 생명을 지켜낸 사람이다. 그러니 미혼모 가정에 대해 편견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연합뉴스 사진]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강철서신'의 저자)
나의 좌우명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이다. 늘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회를 바라보려 한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정직함을 중시한다.
내 삶의 목적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 주민, 아프리카 사람들을 비롯해 극단적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북한 인권운동을 한 것은 북한 실태가 너무 참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어마어마한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체제를 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2025 서울북한인권세계대회 2025년 10월 22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2025 서울북한인권세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북한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2012년 전이었다. 당시는 북한 내부의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활발하게 뛰었던 시절이다. 일부 사람들은 주사파가 최전성기였던 시절을 나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북한 인권운동 과정에서 후회되는 일이 많았다. 북한에서 워낙 인명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판단했다면 그 사람들이 잡히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북한 문제는 평소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도 북한 인권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엄청나게 아프고 인권이 좋지 않은 동포들이 있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 [연합뉴스 사진]
김용균 재단의 김미숙 이사장(김용균 어머니)
나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보고 느낀 것이 있고, 알게 된 것이 많은데 어떻게 모른 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 길이 쉽지는 않다.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야 하고, 그 사고를 되새김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런 운동을 할지 확답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내 아들 용균이는 2018년 12월11일 새벽 충남 태안의 서부발전 컨베이어벨트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들 나이 24세였다.
당일 오전 6시쯤 태안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러 오라고 했다. 우리는 아들이 크게 다쳤거나 의식을 잃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부랴부랴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태안의료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뛰어갔다.
그곳에 용균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안실에 가서 인상착의를 말했더니 청년 한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이 서랍장을 열었고, 석탄 분진으로 얼굴이 까만 청년의 얼굴이 나왔다. 청년의 눈썹을 보고 피부,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아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원청의 책임이다" 2023년 12월 4일 오전 서울 대법원 앞에서 고(故) 김용균 노동자 사망 사건 관련 대법원의 책임 있는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호소문을 읽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나는 용균의 손이나 몸을 만지려 했는데, 영안실 직원이 제지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목과 머리가 분리됐고, 부모가 그 모습을 보면 살아가기 힘드니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들은 우리 부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는데, 영안실 밖으로 쫓겨나면서 현실임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복도에서 뒹굴면서 통곡했다. 아들을 다시 보고 싶으니 보여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문을 잠가놓고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요즘의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청년들이 우리 세대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데, 기성세대들이 모두 망쳐 놓은 것 같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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